퀴어, 감정, 애도

감정과 관련해서, 수업 시간에 쓴 쪽글입니다. 2012년 11월 8일에 작성했습니다.
네, 짐작하시겠지만 한무지의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쓴 쪽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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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완벽하게 퀴어다. 그리고 나는 피곤하다.”라고 말했다. 비록 자신을 “완벽하게 퀴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긴 해도 내가 끌린 지점은 “나는 피곤하다”이다. 강의와 같은 자리에서 나는 트랜스젠더로, 퀴어로 살아가는 삶의 긍정적 힘을 더 많이 얘기하지만 내가 더 많이 고민하는 지점은 그것과 늘 공존하는 어떤 고단함이다. 그리고 시간을 회절하며, 과거 퀴어한 인물의 부정적 감정에 더 공감한다. 이를테면 매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트랜스젠더 텍스트로 읽는 나는, 이름 없는 피조물의 고통스런 감정에 더 많이 움직인다. 그렇다면 퀴어 운동에서 부정적 감정은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가.
현재 퀴어 운동의 정치적 수단은 (여전히) 폭력 피해를 입증하는 방식이다. 차별 경험을 통해서만 퀴어의 적법한 시민권을 요구할 수 있다. 그래서 통계적 수치 혹은 피해를 수집한 자료집이 필요하다. 언론이나 학부생이 요청하는 인터뷰에서 주로 하는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관련 인터뷰는 늘 피해 경험, 퀴어로 살아가는 삶의 어려움을 묻는다. 인터뷰어에게 제목으로 뽑을 만한 피해 경험을 알려준다면 그 인터뷰는 ‘성공적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성공인가?
많은 퀴어 활동가와 이론가는, 정치적 수단과는 별개로 고통과 차별 피해를 전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성애규범성을 되묻는 방식으로 운동과 논의를 전개한다. 트랜스젠더나 퀴어는 질문거리로 구성되지만 이성애는 그렇지 않은 인식체계를 문제 삼는다. 이성애 자체를 탐문하는 것이다. 폭력 피해라는 것이 일상을 규율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지기에 통계로, 사례로 뽑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트랜스젠더 범주는 그냥 인간의 범주고, 트랜스젠더 범주는 (‘인간’이 아니라)트랜스젠더 범주인 동시에 쉽게 발화할 수 없는 범주란 점을 통계적 차별 경험으로 어떻게 포착할 수 있겠는가. ‘고통’과 ‘차별 피해 경험’은 그냥 일상이다. 일상이어서 직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혹은 그럼에도인지 아니면 그 모두여서인지, 축제 형식의 자리엔 많은 사람이 함께 하지만 추모 형식의 자리엔 전자에 비해 매우 적은 사람이 참여한다. 그리고 우리는 동료의 죽음을 드물지 않게 접한다.
함께 활동했던 동료가 세상을 떠났다. 그 죽음을 기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을 퀴어나 트랜스젠더로만 환원하지 않으면서, 그의 삶을 활동가의 역사로만 수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공적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다른 말로 그의 죽음을 운동의 소재가 아니라 죽음 그리고 상실 그 자체로 직면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슬프게도 차별 사례는 있어도 차별에 따른 감정, 혹은 상실에 따른 감정을 설명할 언어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히더 러브의 질문처럼,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전략이 매우 중요함에도 이것으로 충분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퀴어의 쾌락 혹은 즐거움조차 충분히 논의하기 힘든 한국 상황에서 퀴어로 살아가며 겪는 부정적 감정은 차별 피해 사례로만 환원되기에 이를 말하기가 참 곤란하지만 그럼에도 부정적 감정 역시 더 많이 말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정적 감정을 말하는 더 많은 방식을 찾아야 한다.
부정적 감정을 삶의 일부로, 아울러 과거와 현재를 조우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히더 러브의 논의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트랜스젠더로 혹은 퀴어로 살며 겪는 많은 부정적 감정을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 내 삶과 범주를 구성하는 일부로 설명하는 것은 ‘차별피해자’로 존재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부정적 감정, 부정적 경험(사라 아메드 식으로는 아픔)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자원으로 동원되고 그리하여 극복 서사를 통해서만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런 서사에서 부정적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이 감정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부정적 감정은 마주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회피하고 서둘러 극복하여 없애야 할 감정일 뿐이다. 하지만 과거의 강등에서 현재나 미래의 긍정으로 전회는 과거를 과거로 해석할 수 없게 하고 현재와 공존하는 과거의 잔존을 보기 어렵게 한다(19). 시간과 경험은 단선적이기보다 우발적이며 다선적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의 아카이브”(4)란 표현처럼 과거는 현재의 몸을 구성하는 일부다.
다른 한편, 부정적 감정은 진단이란 용어를 만나며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12-4). 많은 감정과 아픔은 사회적 인식 체계에서 누락된다는 점에서 사회에서 소통하고 통용할 수 있는 감정으로 구성되지 못 한다. 퀴어의 부정적 감정은 매우 자주 ‘개인의 피해의식’으로 구성된다. 사회적 인식 체계에서 포착되지 못 한 감정은 개인의 착오지 ‘감정’이 못 된다. 그래서 감정을 진단하는 것, 부정적 감정을 읽는 것은 ‘피해의식’을 사회구조에 맥락화하는 작업이며 그것에 실체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이 사회의 구조를 진단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부정적 감정은 이 사회의 다양한 규범성을 드러내고 또 진단한다.
버틀러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완벽하게 퀴어라는 것과 피곤함은 모순이 아니다. 이것은 언제나 동시적 감정이다. 수치심이 자부심으로, 자부심이 수치심으로 전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28), 수치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자부심을 외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끼며 머뭇거리기도 한다.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은 대립하는 감정이 아니라 언제나 공존한다. 이것은 대립쌍으로 공존하는 것도 아니다. 퀴어는 혐오의 대상이(었)고 우리는 혹은 ‘나’만은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27).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거의 동시에 느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폭력 피해를 퀴어의 유일한 경험 혹은 대표 경험으로 재현하지 않으면서, 부정적 감정을 폭력 피해로 수렴하지 않으면서 이 경험을 애기할 수 있는 더 많은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붉은 꽃: 감정

붉은 꽃 피고 진 자리에 남겨진 흔적.
붉은 꽃, 활짝 핀 자리보다는 피지 못하고 시든 자리가 더 선명하고 오래 남아. 응어리처럼 고여선, 오래도록 피지 못했음을 알려주지.

사실은, 정작 나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어. 아니, 나의 감정 상태는 언제나 뒷전이라는 걸.

그래, 그래서 슬프니? 슬펐니? … 응. 그런가봐.
근데 기쁘니? 기뻤니? … 응, 기쁘기도 했던 것 같아.
혹은 그때, 그 순간, 먹먹했던가.
감정은 언제나 복잡하게 얽혀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면서도 울 기회를 찾고 있어.

오랜만에 “공허”라는 단어를 썼어. 루인의 상태를 설명하며 [Run To 루인]에 “공허”란 단어를 쓴 적은 거의 없는데. 지금은 “공허”, 그러다 어느 순간 “빈곤”을 얘기하겠지. 아냐. “공허”와 “빈곤”은 그저 설명하는 언어일 뿐,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같아.

붉은 꽃이 피고 진 자리의 흔적. 이 계절이 오고 반팔을 입는 시기가 오면 이렇게도 신경 쓰여. 혼자서 자꾸만 신경 쓰고 있어. 별거도 아닌데 자꾸만 신경 쓰여서 이렇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어. 이제 그만 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