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봄이 오고 있다. 싫고 또 좋다. 집 근처 고양이에겐 그나마 괜찮은 시간이겠지. 여름이 오면 또 힘들까? 그래도 추위보단 괜찮겠지?
02
융은 아직도 밥을 먹으러 온다. 지난 겨울을 무사히 넘겨 다행이다. 하지만 처음 밥을 먹으러 왔을 때 만큼 자주는 아닌 듯하다. 가끔 만나기에 내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지만.
며칠 전엔 이틀 연속 융을 만났다. 융을 처음 만났을 땐 이틀 연속 만남이 새로울 것 없었지만 요즘은 드문 일이다. 더구나 그날 저녁엔 날 기다리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루스가 아니면 그렇게 울지 않으니 루스인가 했지만 목소리가 달랐다. 계단을 올라가니 융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웅… 배가 많이 고팠구나…
다른 아이들도 그렇지만, 내가 주는 밥으로 모든 식사를 해결하는 것 같지는 않다. 대여섯 고양이가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현재 내가 주는 양은 턱없이 부족하다. 고양이 두셋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양이겠지만. 그러니 다른 곳에서 밥을 찾다가 먹을 것이 없으면 집 앞으로 오는 듯하다. 혹은 배 고플 때 저 집에 가면 사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듯하다.
03
루스는 여전히 활기차다. 한땐 아침 저녁으로 내가 밥을 줄 때면 몇 집 건너에 있는 옥상에서 자다가도 일어나 내게 다가오곤 했다. 물론 우리 사이의 거리는 50센티미터에서 1미터 사이. 나만 만나면 밥 내놓으라고, 혹은 캔사료 달라고 울기 바쁜 이 녀석은 자주 보이다가도 가끔은 한동안 안 나타나곤 한다. 뭐, 잘 지내고 있겠지.
04
융과 루스의 복잡한 관계란 뭐랄까, 묘하게 내가 당하는 기분이랄까?
집에 있을 때면 가끔 고양이가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나가면 루스는 꼭 있고, 상대는 대부분 융. 융과 루스가 영역싸움을 한 것이겠지. 루스가 터줏대감 노릇을 하려는 느낌이랄까. 이런 싸움이 먹히는 고양이도 있겠지만 융에겐 통하지 않는다. 거의 언제나 융은 밥그릇 가까이에 있고 루스는 계단 근처에 있으니까.
그리고 난 이 둘이 싸우는 소리에 밖에 나갔다가 융을 만나면, 거의 항상 캔 사료를 준다. 오랜 만에 융을 만난 반가움도 있고, 처음으로 밥을 먹으러 온 고양이기도 해서 유난히 정이 더 간달까.
첨엔 그냥 반가워서, 그리고 여전히 융에게 애정이 있어 캔사료를 주는데… 최근엔 내가 당했다는 느낌이랄까. 둘이 싸우는 것처럼 일부러 소리를 지르면 내가 확인하러 밖으로 나가고 그리하여 캔사료를 획득하는 전략. 진실은 과연…
05
집 근처 고양이 중, 늘 붙어다니는 흰둥이 둘이 있다. 정확히는 등부분에 깜장 얼룩이 있는 흰둥이1과 얼굴만 젖소 얼룩 무늬인 흰둥이2. 이 둘은 다른 고양이와 달리 내가 밖으로만 나가면 후다닥 도망가기 바쁘다. 멀리 떨어진 상태에선 얼굴을 확인하지만 사료 근처에선 얼굴 확인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며칠 전 저녁 재밌는 일이 있었다.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집에 왔다. 밥그릇이 비어 있기도 했고, 원래 저녁을 주는 시간이라 밥그릇을 채우고 있는데 어디선가 야옹, 우는 소리가 들었다. 어딜까 두리번거리니 저 멀리서 흰둥이 둘이 달려오고 있었다. 흰둥이1은 조용히, 흰둥이2는 나를 보곤 야옹 울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집 근처, 이웃집 담장 근처까지 와선 흰둥이2는 얼굴을 내밀곤 조용히 야옹 울었고, 흰둥이1은 눈만 조금 보일 정도로 날 살폈다. 집에 들어갔다가 5분인가 10분 정도 지나 귀를 기울이니 사료를 먹는 소리가 들렸다.
아웅… 배가 많이 고팠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도망가면서도 내가 밥을 주는 인간인 건 아는구나 싶기도 했다.
06
내가 부자가 아니어서 안타깝고 부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사료를 많이 줄 수 없다는 건, 허기를 채울 정도 밖에 못 준다는 의미이자 다른 곳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못 찾으면 집으로 온다는 의미다. 아울러 내가 사료를 주지 않아도 살아 남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의미다. 그래도 미안하고 다행이다.
07
며칠 전 저녁. 집 근처 골목을 도는데 발 아래서 뭔가 후다닥 숨었다. 동네 슈퍼마켓 앞이었고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있었다. 냉장고 아래를 보니 작은 고양이가 바르르 떨고 있었다. 덩치는 기껏해야 두어 달 되었을까? 비쩍 마른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아… 이 험한 세상 무사히 살아 남을 수 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