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리카, 카노, 노아, 그리고 아메.

흰색에 고등색, 갈색, 검은색 등이 어울린, 일명 삼색 고양이는 리카.
검은색에 흰색 신을 신은 고양이는 카노.
흰색에 고등어무늬의 고양이는 노아.
흰색에 주황색 가필드 무늬가 있는 고양이는 아메.
하지만 아메가 실제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 고양이가 셋 이상인 건 확신했지만, 자주 만나는 건 리카와 카노. 노아와 제대로 만난 건 어제 밤이었다. 내가 집 근처에 있는 시간은 아침과 늦은 밤이라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대충 셋 이상이라고 짐작했다.

내가 귀가하는 시간, 나를 기다려주는 냥이는 리카나 카노였다. 어젠 리카와 카노가 자동차 아래서 식빵 굽는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밀하겐 ‘나’를 기다린 건 아니지만.. 하하.) 그런데 리카과 카노 외에도 노아가 잔뜩 긴장한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히히.

아메는 어느 아침에 잠시 만난 적이 있다. 늦은 밤에 잠시 만났다가 이른 아침 자동차 아래서 식빵을 굽고 있는 아메를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노아와 헷갈린 건진 확실하지 않다. 밤의 고양이와 아침의 고양이는 다르다. 낮의 고양이는 또 어떤 표정일까?

리카를 처음 만난 건 지붕 위를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난 단박에 리카에게 반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그런 리카가 가끔은 나를 기다린다. 물론 우리의 거리는 2미터. 하지만 적정 거리만 유지한다면 리카는 도망가지도, 숨지도 않는다. 카노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카노는 좀 더 용감하다. 카노의 적정 거리는 1.5미터. 리카가 가까운 거리에 사람이 있으면 꼼짝도 안 한다면 카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매우 조용하게 움직인다. 둘은 자주 같이 다니거나 같이 앉아 있다. 남매/자매/형제 관계인 걸까? 알 수 없다. 노아는 따로 다니는 거 같다. 하지만 리카, 카노와 낯선 사이는 아닌 듯하다. 노아는 아직 나와 익숙하진 않다. 하지만 나를 알아 봐주는 거 같아 매우 기뻤다. 리카도 사람을 많이 가리지만, 노아는 더 심하다. 리카는 눈을 마주하며, 내가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다면 노아는 숨어버린다. 도망가지는 않지만 자신의 몸을 가급적 숨긴다. 그리고 아메는 … 정말 존재하는 걸까? 내가 착각한 걸까?

그리고 내 삶이 변하고 있다. 행복하고, 기쁘지만 그런 만큼 불안하고 걱정이다.

+
다섯 번째 다른 냥이가 나타난다면, 아리라고 부를 거다.냥이 이름을 메리라고 붙일 순 없잖아. 그리하여 냥이들 이름을 붙인 방식이 드러났다. 으하하. 나도 참 상상력 부족이다.

++
언젠가 어떤 이야기를 쓰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은 짧은 흔적으로 충분하다.

[길고양이]고양이: 얼룩이, 가필드, 그리고 내 사랑 리카

01
2007년 설 연휴가 지나고, 당시 사무실과 연구실을 겸해서 사용하던 곳에 갔을 때, 나는 바짝 말라 죽은 화분을 보았다. 일주일 동안 사무실을 비운 동안, 허브는 오랜 가뭄으로 말라죽은 것처럼 죽어있었다. 나는 너무 미안했고, 일종의 죄책감에 다시는 살아 있는 생명과 함께 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니, 내가 책임질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다른 생명/존재와 함께 살지 않기로 했다. 이건 무서운 교훈이었다.

2007년 추석 연휴 기간, 설에 부산에 갔는데, 추석에도 가야 하느냐며 서울에 머물렀다. 날마다 연구실 혹은 사무실에 나왔다. 그러며 학교고양이들에게 참치캔을 주었다. (관련글은 여기) 다른 날이라면 학교에서 음식을 찾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추석 연휴 동안은 쉽지 않을 일. 사람들이 없기에 학교는 일시중지 상태에 빠진다. 사람을 기준으로 학교는 일시중지. 하지만 학교에서 살아가는 식물들, 고양이들은 여전히 살아야 한다. 제 삶을, 생을 일시중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추석연휴 기간 동안에만 음식을 주기로 했다. 최소한의 음식으로 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아울러 나와 고양이가 서로 적응하지 않고 서로에게 길들지 않도록.

추석이 끝났을 때, 나는 ‘고양이사료라고 불리는 음식을 사서 꾸준히 줄까’라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결국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민으로 끝났다. 그 이후 내가 머물던 연구실 혹은 사무실이 있는 건물 근처의 고양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여전히 잘 살고 있을까? 그해 겨울이 지나면서 익숙했던 고양이 울음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걱정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진 않았다. 지금에 와선, 그냥 음식을 조공(!)했어야 했다고 판단하지만, 이 판단은 현재의 것이다. 그 시절엔 거리두기, 무심하기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것이 비록 나 편하자고 내린 결론이라고 해도.

02
학교마다 사람을 주인으로 삼지 않는 동물(혹은 비-인간)들이 있는 거 같다. 내가 다녔던, 여전히 일을 핑계로 만날 드나드는 학교에도 몇 종의 동물이 있다. 토끼도 있고(아직도 있을까?) 고양이도 있다. 고양이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가며 출몰한다. 그 고양이들은 길고양이가 아니라 학교고양이일 테다. 학교를 생태계 삼아 살아가는 이들.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학교란 공간을 자신들의 집 삼아, 생태계 삼아 살아가는 고양이들.

지금 내가 일을 빌미로 자주 드나드는 학교엔 고양이가 최소한 둘 있다. 한 아이는 흰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얼룩이고 다른 아이는 가필드를 닮은 고양이다. 재밌게도 둘의 성격은 너무 다르다. 얼룩이는 놀랍게도, 사람들 근처에 다가와선 곧바로 몸을 뒤집어 배를 드러내며 애교작렬이다! 덕분에 난 생전 처음으로 낯선 고양이와 접촉할 수 있었다!! 쓰다듬으면서 느낄 때의 행복이란!!! 얼룩이는 무려 나를 포함한 사람들 주위를 떠돌고 몸을 부비며 친밀함을 표했다. 아아. 난 얼룩이를 쓰다듬은 후, 톰 소여가 좋아하는 이와 처음 악수했을 때처럼, 고양이를 쓰다듬은 손을 평생 씻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유치함을 발휘했다. 하하. 반면 가필드는 여전히 사람을 경계한다. 혹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물론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처럼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그저 사람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얼룩이가 애교작렬이라면 가필드는 고양이 특유의 도도함이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잘 보여준다. 음식이나 고양이 간식을 줘도, 가필드는 사람이 너무 성급하게 다가가면 그냥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얼룩이에겐 꾸준히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난 며칠 전에야 발견했지만, 고양이 음식 접시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 고양이사료(비스켓처럼 생긴 거)를 주는 날도 있고, 쌀밥을 주는 날도 있다. 그 덕에 적어도 얼룩이는 살이 올랐고, 털 빛도 고와졌다고 한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걸 꺼리지 않는 얼룩이는, 그 덕에 적당한(그러나 고양이에게 적당한 음식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으리라. 반면 가필드의 털 빛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도 얼룩이에게 주는 혹은 학교고양이들에게 주는 음식을 같이 먹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한 아이의 건강이 다른 아이의 건강에도 전염되어, 같이 건강해지지 않을까?

아무려나 추측컨데 고양이의 음식을 챙겨 주는 사람은 한 명은 아닌 듯하다. 처음엔 한 명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음식접시를 챙긴 사람은 한 명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곳에 물과 밥을 준 사람도 한 명이었을 테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챙기는 밥 외에도 시중에 파는 사료를 챙기는 사람, 고양이 간식을 챙기는 사람이 생겨나고 있다. 그저 이런 일이 일시에 중단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챙길 거라고 믿는 순간, 누구도 챙기지 않는 일이 생기니까. 일정한 조공(!)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학교고양이에게 조공의 중단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으니까.

난 아직은 간식거리(포로 만든 간식) 정도만 가끔 챙기는 1人이다. 12월 중순이 지나서도 내가 학교를 드나든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저 처음 접시를 가져다 둔 사람이 꾸준히 음식을 챙겨주길 바랄 뿐이다. 내가 가끔 간식을 주는 건, 고양이에게 조공을 받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 접시를 가져다 놓고, 밥을 주기 시작한 사람을 지지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것이 중요하다. 혼자가 아니란 걸 깨닫는 것,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기에 서로를 독려하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03
어제 밤, 집 근처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며칠 전 나타났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리카가 나왔다. 온전히 리카에게만 신경을 쓰며 기다렸지만, 리카는 돌연 나타났다. 흰색에 갈색과 고등색, 검은색이 예쁘게 어울리는 길냥이, 리카. 나는 잠깐 놀랐고, 놀람은 곧 기쁨으로 설렘으로 변했다. 리카는 소리없이 나타나선 잠시 멈춰 나를 보았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리카는 다시 사뿐한 걸음으로 자동차 밑으로 들어갔다. 나는 자동차를 지나 낮은 담을 뛰어넘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리카는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선 내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으로 나와선 멈췄다. 앞발을 세우고 앉은 자세를 취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곧 깨달았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리카는 움직이지 않고 나를 보았다. 나는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리카는 만족스러운 듯, 자동차 밑에서 나와 낮은 담을 돌아 지나갔다. 그러곤 ‘그곳’으로 갔다. 나는 매우 조용히, 조심스럽게 세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곳’에 리카가 있었다. 리카는 나를 등지고 있다가 뒤돌아 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라고 내가 우기는 거다;;). 나는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고선 玄牝으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에도 리카와 마주쳤다. 평소 아침에 만나는 일은 드물어 기뻤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는 멈췄다. 리카가 안심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기. 사람이건 고양이건, 모든 생명과 존재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가만 서있었다. 하지만 그 거리가 리카에겐 불편했나 보다. 리카는 얼른 자동차 아래로 들어갔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리카를 보았다. 리카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두근거림으로 한참을 마주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동차의 다른 쪽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리카는 나를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몸을 틀어 나를 보았다.

리카는 나를 기억할까? 알 수 없다. 눈이 마주친 건, 나 혼자의 착각일 수도 있다. 리카는 나를 경계하며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준비하는 건지도 모른다. 리카에게 난 그저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인지도 모른다. 괜찮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이와 경계와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걸 허락해주는 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리고 매일 비슷한 시간,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주절주절: 겨울의 길고양이, 트랜스젠더 강좌, 권력을 활용하기

왜 가끔은 내 안의 무수히 많은 언어들이 다 어디갔나, 싶을 때가 있죠. 다들 경험하셨겠지만요. 무언가를 쓰고 싶지만, 무엇하나 주절거리기에 부족한 내용들이라 무언가를 쓰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들의 조각들을 늘어놓는 수밖에 ….

전 요즘 길고양이들은 겨울을 어떻게 보내나, 하는 고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추운 겨울, 길고양이들에게 겨울은 어떤 풍경일까요? 집에서 사는 것이 익숙한 저에겐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죠. 찬 바람이 쌩쌩 불고 때로 겨울비와 눈이 내리는 밤, 고양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요?

혹은 트랜스젠더 강의는 어떻게 해야 ‘쉬울까’를 고민합니다. 사실 전 트랜스젠더 특강 가서 트랜스젠더에 관한 얘기는 거의 안 합니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의 어려움을 듣고 싶어하지만, 저는 젠더 경험에 초점을 맞추죠. 그리고 비트랜스의 젠더경험과 트랜스젠더의 젠더경험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고 애씁니다. 아무래도 초보 강사니 여러 강의안을 만드는데요. 최근 ‘딱 학부생용이다’ 싶은 강의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정도 그 강의안을 바탕으로 강의를 했는데요. 최근 특강을 들으신 선생님(저를 특강으로 초대한 선생님이기도 하죠)께서 말하길, 학부생이 듣기엔 너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헉. ㅜ_ㅜ 그래서 혹시나 하고 “그럼 대학원생이 듣기엔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대학원생(아마도 여성학/젠더이론 전공일) 정도면 무난하겠다고 답하셨죠. 우허엉. ㅠ_ㅠ 며칠 전 특강의 수강생들의 감상문을 받았는데요. 어렵다는 말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너무 많은 내용을 말해서 초점을 모르겠다는 말도 있고요. 이건 모두 중요한 지적입니다. 가장 정확한 지적은 강사님은 강의를 많이 안 하신 듯해요, 란 논평이었습니다. 매우 고마운 논평이죠. 초보 배우는 무대에서 발걸음부터 어색하다고 했나요? 저런 논평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겁니다. 아무려나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트랜스젠더의 경험과 비트랜스의 경험을 분리하지 않는 강좌를 쉽게 하기. 이 고민을 하며, 저는 ㅎ님을 스토킹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갈 수 있는 시간대면 ㅎ님 강좌를 따라 다니기로 한 거죠. 하하. 스토킹하겠다고 말했는데 특강 일정을 알려주는 경우도 스토킹인지는 애매하지만…. 암튼 열심히 배워야죠. 🙂

다른 한편,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이를테면 제가 트랜스젠더 이슈로 특강을 할 수 있는 건, 제가 가진 어떤 권력 때문이죠.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는 매우 많고, 트랜스젠더 연구를 전공한 사람은 저 외에도 여럿 있고, 트랜스젠더 이슈로 특강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저보다 강의를 더 잘하고, 글도 더 잘 씁니다. 그럼에도 제가 한다는 건 제가 가진 어떤 특권적 자원과 떼려야 뗄 수 없겠죠. 이것이 제가 가진 권력이라면, 어쨌든 이것이 권력이라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 해야 겠죠. 한땐 권력을 전면 부정한 시기도 있습니다. 권력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이해한 시기도 있고요. 하지만 권력이 맥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저에게 활용할 만한 권력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적절히 활용할 것인가? 즉, 미약하나마 어떤 권력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힘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것이 관건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암튼 내일은 극장에라도 갈까 봐요. 선택할 만한 영화가 없어 고민이지만요. 그리고 무척 피곤해서 늦은 밤이지만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