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주제로 글쓰기: 채식과 학벌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첫 번째 판본은 초고란 전제 하에서 발송했다가 5일 만에 취소했다. 글을 취소한 날인 지난 토요일은 청탁 마감 날이었으니 꽤나 당혹스러웠으리라. 여러 가지로 친구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하나의 판본을 쓰고 프린트를 했지만 역시나 폐기했다. 그렇게 (첫 번째 판본과는 완전히 다른)세 번째 판본을 썼고 친구에게 글을 보여주고 메일로도 보냈다. 첫 번째 글은 기획을 잘못 해석한데다 글 자체도 어정쩡했다. 두 번째 판본은 첫 번째 판본을 폐기하면서 새로 구상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겠다는 욕심이 보여 폐기했다. 오직 한 가지 얘기만 하겠다고 다짐하고 세 번째 판본을 새로 썼다. 일요일인 어제 쓰고 오늘 낮에 메일로 발송했다. 루인에게야 모든 글이 초고이니 계속 고쳐야 하지만(발송하고 나서 다시 읽으며 또 퇴고를 했다는;;;) 틀 자체는 안 바꿔도 될 듯 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어제 아침에야 비로소 기획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간 기획의도를 잘못 파악한 측면이 있었고(몇 가지 지점들은 파악했지만, 결정적인 측면을 놓치고 있었다) 어떤 강박들이 있었다. 더군다나, 루인의 많은 글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 편의 글에 다 쏟아 붓는 편이라면, 이번 글은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주는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 글엔 “루인의 글”이란 어떤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ㅋㄷ의 지적처럼 첫 번째 판본은 “루인의 글”이란 느낌이 없었다. (ㅋㄷ, 고마워요!)

이렇게 세 가지 판본을 쓰는 과정을 거치면서 배운 건, 한 편의 글엔 한 가지 얘기만 하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쓴 많은 글들이 한 편의 글에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풀었고(마치 이 글이 루인의 마지막 글이자 유일한 지면이라도 되는 냥) 그래서 다소 산만하거나 중구난방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면, 이번 글에선 어떻게든 한 가지 이야기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하고 싶은 얘기는 많았다.

선택한 주제는 채식과 학벌이었다. 아니, “채식으로 읽는 학벌, 학벌로 읽는 채식”이 더 정확하겠다.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 온 루인으로선 채식과 학벌이라는 관계가 꽤나 선명한 편이고, 채식과 관련한 최근 고민 역시 이 지점이기에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 재밌었다. 그런 동시에 이 주제가 이번 기획의도를 꽤나 잘 반영할 수 있겠단 느낌도 있었다. (내용을 압축한다면 “음식의 정치학“에 있는 내용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이번 글은 블로그에 공개할 수는 없는 성격이라서;;; 물론 공개하고 싶은 바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글을 쓰면서, 채식과 학벌의 관계를 좀 더 집중적으로 다뤘고 그래서 스스로 뭔가를 정리할 수 있었다. 다른 여러 교차지점들을 동시에 다뤄야 한다고, 이 부분은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고 다른 지점들과 같이 얘기해야 해, 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그걸 매끄럽게 풀어낼 능력이 현재의 루인에겐 없고, 글의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일부러 쓰지 않기도 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이유로 제한했는데, 그 이유는 친구가 알고 있으니까….) 이런 “쓰지 않음”을 통해 루인의 위치와 이 글의 한계를 분명히 할 수 있고, 괜히 이것저것 다 언급해서 비판을 피해갈 여지를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한 가지 측면이라도 분명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채식과 관련한 다른 많은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하지 않고, 채식과 학벌의 관계에 집중해서 글을 전개했다.

그러며 주제를 좁혀야 할 필요성을 조금은 느꼈달까. 주제를 좁혀서 글을 쓸 필요가 있다는 선생님들의 지적이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번 글쓰기 작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다른데 있다. 그것도 “루인의 글”같지 않은 그 글, 즉 폐기한 그 글 속에 있다. 루인에게 가장 중요한 지점. 하지만 이 지점은 친구에게 먼저 말하고 여기 써야지. 이렇게 하겠다고 딱히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그냥.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고 소중함의 표시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 나누고 싶은 얘기가 참 많은데….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있어야만 만나는 건 아니지만….

+
확실한 건, 이렇게 나온 세 번째 판본과 같은 글은 다른 어디에서도 쓸 수 없는 글이란 것. 특히나 “루인”이란 이름으로 외부지면에서 쓸 수 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고. 그래서 이런 기회를 준 친구에게 더욱더 고맙다.

글쓰기: 위가 아프고 속상하고.

잘 쓴 글을 읽으면 위가 아파. 시기심이 아니라 루인도 그렇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을 생겨서. 그 사람은 별로 힘도 안 들이고 한 번에, 휙, 잘도 쓰는 것 같아. 괜히, 타고난 재능은 따로 있나, 구시렁거리기도 해. 그래서 괜히, 또, 글을 써. 고치길 반복하지.

글을 잘 쓰고 싶어. 글만이, 언어만이 루인이 가진 거의 유일한 힘이니까.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어. 그냥 한 번에 휘갈겨 써도 위가 아플 수 있는 글. 하지만 잘 안 돼. 초고를 쓰고 나면 언제나 엉성해. 그래서 문장을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지. 문단 배치도 바꾸고, 그러다 지우고 다시 쓰기도 해. 몇 번을 고쳐도 불만족. 좀 잘 쓰고 싶은데 고칠수록 불만만 쌓이면, 속상해. 왜 이렇게 글을 못 쓸까.

이번 주 내내 글과 관련해서 깨지고 있어. 개별연구 시간엔 예전부터 계속해서 지적받은 사항을 여전히 지적 받고 있어. 출판회의 땐 글의 목적이 모호하기에 과감하게 버릴 부분은 버리고 성격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단 말을 들었어. 또 다른 글은, 어정쩡하기만 해. 이렇게 깨지고 있으니 속상하냐면, 그렇진 않아. 사실 기쁘기도 해. 글을 써서 이렇게 신나게 깨진 것도 참 오랜 만인 걸. 그리고 비록 논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듣는 논평이라고 해도, 신나는 논평은 논평할 만한 글이긴 하단 걸, 신랄하게 비판한다는 건 그 만큼 애정을 갖고 있단 걸 의미하니까.

대책 없이 이런 낙천적인 해석을 해도,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은 여전해. 아니, 속상해. 이 정도 밖에 못 하나 싶어서 그냥 관둘까 싶기도 해. 하지만, 속상함이 변태할 수 있는 힘이란 걸 믿어. 믿는 수밖에 없잖아. 믿을 건 불안과 걱정뿐이고, 불안과 걱정만이 변태할 수 있는 힘이니까.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서투른 자신의 글을 읽을 때면 속상해. 더 잘 쓰고 싶어.

트랜스젠더

친구가 이사를 한다고 했다. 이삿짐 나르는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시간이 붕 떴다. 시간 계산에 착오가 있었고, 그리하여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까 했지만,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더 많이 들겠다 싶어, 근처의 지하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역에 가면, 책상과 의자가 있으니까.

루인은 블로그에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면지에 볼펜으로 글을 쓴다. 이런 얘길 사람들에게 하면 요즘 들어 이런 경우는 드물다며, 모니터 화면을 보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얘기도 자주 듣는다. 지하철역에 가서 책을 읽을까 하다가 어제의 내일인 오늘이 마감인 글을 쓰기로 했다. 이면지는 언제나 몇 장정도 가지고 다니는 편이기에 종이는 넉넉했다. 다만 걱정은 요청한 원고 분량이 원고지 5~6장인데, 펜으로 쓰다보면 그 분량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 아무려나 일단 대충 하고 싶은 얘기를 썼다. 그러곤 한 번 수정하고 나서 글자수를 세기 시작했다. -_-;;; 크크크. 대충 이 정도 분량이면 5~6장이겠다 싶은 분량으로 해서 수정과 편집을 거친 후, (분량이 적었기에 반복해서 쓴다고 해서 힘들진 않았다) 일단 초안은 완성. 나중에 사무실에 돌아와 워드작업을 하니, 후후후, 딱 요청 분량. 내용은 만족스럽지 않은데 분량을 맞췄다는 사실에 혼자 좋아했다. ;;;

이제 곧 있을 인권영화제에서 해설책자를 내면서 인권해설이란 글이 들어가는 듯한데, 그곳에 실릴 목적으로 글을 청탁 받았다. 그곳에서 요청한 주제는 “인권해설은 성전화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알기 쉽게 써주시면 됩니다.“였다. 하지만 쓴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잡았다. 왜냐면, “우리는 어떤 차별을 받고 있다”는 식의 글을 별로 안 좋아 하기도 하거니와 이와 관련한 내용은 기사검색만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 다른 접근을 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적어도 영화제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더욱더.

[#M_ 읽기.. | 접기.. |

트랜스젠더 혹은 “나”를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어떤 지점을 어떤 식으로 주장할 것인가란 고민 때문이다. 흔히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해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얘기하곤 한다. 물론 자신의 몸이 변하면서(일테면 사춘기를 거치며 가슴이 나오거나 월경을 하는 것, 목소리가 굵어지고 수염이 나는 것) 몸과 갈등을 겪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세상엔 남성과 여성이란 두 가지 성별뿐이며, 태어날 때 할당 받은 성별과 어떤 갈등도 경험하지 않는다는 식의 가정을 은폐한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들이 경험하는 갈등과 긴장은 “그들 개인의 문제”이고 “치료”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한다”란 식의 언설은 트랜스젠더들의 경험을 설명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유일한 설명 방식은 아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만 설명한다면, 현행 호적제도나 신분제도 등으로 인해 경험하는 갈등, 그리하여 끊임없이 호적상의 성별을 변경하고자 하는 요구들을 설명하기 힘들다.

이 글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얼마나/어떻게 고통 받고 있는지를 쓰지 않는다. “나”를 주장하기 위해 “나”의 고통을 전시하고 “나”의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니며, “내”가 이 만큼 고통 받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주장할 수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이 우리는 이 만큼 고통 받고 있으니 이를 해결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범주를 어떻게 만들고, 인권의 의미를 누가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가란 질문과 같이, 해석들이 경합하는 장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나”의 고통을 말하기에 앞서 고통의 전시를 통해서만 나를 주장할 수 있는 맥락들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질문은 “트랜스젠더가 되는 이유는 무엇이냐”와 같은 형식이 아니라 사회적, 법적, 문화적 제도가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기획하는가로 바뀔 필요가 있다. 동시에 트랜스젠더와 어떻게 소통할지 모르겠다와 같은 말은, 상대방이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았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지와 동시에 고민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 있는 언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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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아이디어는 “Transgender? Transgender!“에 썼던 내용들을 토대로 했다. 팜플렛에 들어갈 내용으로 썼는데 팜플렛이 나왔는지 모르겠고 -_-;;; 아이디어는 비슷하다고 해도 그런 아이디어를 구성하는 문장 방식은 변했다는 느낌이 있다. 이 느낌을 믿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