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청소녀-‘불량’-구금시설 관련 논문들

이런저런 일로 영어논문을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학교에 속한 학생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입장에서 영어논문을 읽는다는 게 뭐 그리 대수겠어요. 영어건 한국어건, 논문인건 단행본이건 뭐건 읽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뭐든 읽지 않고 있다면 그걸 부끄럽게 여기고 고백해야겠죠. 그러니 읽는다는 일은 특별할 것 없습니다. 다만 저로선 워낙 새로운, 이제까지 공부하지 않은 영역을 읽고 있어서 이런저런 고민이 많달까요? 제가 구금시설, 비행/일탈/불량, 십대와 같은 주제어로 논문을 찾고, 읽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뭐, 워낙 잡식성에 온갖 것에 관심이 있으니 언젠가는 한번 읽었겠죠. 하지만 이렇게 찾아서 읽을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집중해서 여러 편을… 하하;;

찾아 읽은 논문 중엔 상당히 좋은 논문도 많고 제목에 낚였다는 느낌이 드는 논문도 많습니다. 낚였다는 느낌이 드는 논문의 대다수는 양적연구를 수행한 논문입니다. 설문지를 몇 백 명에서 몇 천 명에게 돌려 그 내용을 통계로 분석한 논문들. 고백하자면 학교를 다닐 때, 통계분석(양방) 논문을 읽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2년 동안 5편이 될까 말까 합니다. 그보다 적을 수도 있고요. 전 통계분석 논문은 재미가 없어서 안 읽는 편입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한국에서 트랜스젠더의 생활을 조사한 후, 트랜스젠더가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건 정말 힘들다란 결론을 내린다면? 읽는 시간이 아까워요. 조사한 사람에겐 의미가 있으려나요? 정책이나 제도를 바꾸기 위한 자료로선 의미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통계자료를 통해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제시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논문이라면 힘들다는 통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조적인 맥락 등을 같이 분석해야겠죠.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도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을 학술지 논문을 제시한다는 건 좀… 양식이 없거나 양심이 없거나…

Cochran, Bryan N., Angela J. Stewart, Joshua A. Ginzler, and Ana Mari Cauce. “Challenges Faced by Homeless Sexual Minorities: Comparison of Gay, Lesbian, Bisexual, and Transgender Homeless Adolescents With Their Heterosexual Counterparts.”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92.5 (2002): 773-777.
Cochran 등이 쓴 논문 “노숙 성적소수자에 의해 직면하는 도전: 이성애 노숙 청소년과 게이, 레즈비언, 바이 그리고 트랜스젠더 노숙 청소년의 비교”를 읽었습니다. 일단 제목만으론 혹합니다. 검색하다가 이 제목에 끌려 내용도 검토하지 않고 출력부터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이성애 노숙청소년보다 LGBT 노숙청소년이 더 어렵다, 성적지향 및 동성애혐모/호모포비아 문화와 십대란 점이 겹쳐있다…가 끝입니다. LGBT 십대의 가출을 호모포비아 문화와 연결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문장에 감동 받을 정도입니다. 겨우 이 문장에… 물론 잡지의 성격에 따라, 분과학문에 따라 논문을 쓰는 방식에 차이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좀… 암튼 제목 하나는 잘 뽑았습니다. ㅡ_ㅡ;;
(조만간에 읽을 논문 중에 더 매력적인 제목도 있는데, 그건 어떨까요? ;; )

Widom, Cathy Spatz, and Joseph B. Kuhns. “Childhood Victimization and Subsequent Risk for Promiscuity, Prostitution, and Teenage Pregnancy: A Prospective Study”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86.11 (1996): 1607-1612.
위덤과 쿤스의 논문 “아동 피해와 그것이 난교, 성매매, 그리고 십대 임신에 끼치는 위험”을 읽었습니다. Promiscuity를 사전에선 난교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아니, 동의할 수 있는 번역이 아닙니다. Promiscuity는 일부일처가 아닌,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성관계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논문을 읽다보면 1년 동안 10명과 성관계를 맺은 경험을 promiscuity란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논문의 전제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용은 어린 시절의 아동폭력 피해 경험이 promiscuity, 성매매, 그리고 십대임신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여타의 논문이 통상적인 통계 자료를 비교하며, 아동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이들은 promiscuity, 성매매, 십대임신 경향이 상당히 높고, 피해 경험이 없는 이들은 경향이 낮다는 식의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런 비교는 두 집단의 다른 사회적 조건을 간과합니다. 만약 피해 경험이 있는 집단은 빈곤층이 상당수고 피해 경험이 없는 집단은 상류층이 상당수라면? 빈곤층에 피해 경험이 많고, 상류층에 피해 경험이 적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급, 젠더, 인종, 성적지향, 젠더정체성 등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고려해야 하는데 간과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 논문은 아동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집단과 피해 경험이 없는 집단을 나눌 때 비슷한 환경에 있는 이들을 선별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다른 조건은 비슷하게 세팅하고, 아동폭력 피해 경험 여부만을 변수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물론 이런 세팅이 완벽할 수 없는 건 저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데이터 통계를 분석하니, promiscuity와 십대임신은 아동폭력 피해 경험과 상관관계가 없고, 성매매만 아동폭력 피해 경험과 관련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결론은 기존의 많은 논문들이 제시하는 결론은 다르고요.

이 논문은 데이터 통계분석이 중심이지만 조사분석을 위한 세팅의 방식에 따라 상당히 흥미로운 논문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구조적인 분석 등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통념을 반복하긴 합니다. 하지만 세팅만으로도 이렇게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관련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이미 이런 기법을 잘 알고 계시겠죠? ^^;; )

Brown, Lyn Mikel, Meda Chesney-Lind and Nan Stein. “Patriarchy Matters: Toward a Gendered Theory of Teen Violence and Victimization.” Violence Against Women. 13.12 (2007): 1249-1273.
브라운, 체스니-린드, 스틴(슈타인?)의 논문을 읽었습니다. 논문 제목을 번역하기가 좀 난감한데요. 이 논문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제목의 단서가 나옵니다. “… the reality that living in a patriarchy matters.” 대충 옮기면, 가부장제에서의 삶이 물질로 만드는 실재…? 가부장제라는 사회구조에서 여러 억압 구조들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삶을 문제 삼자는 내용인데, 이걸 한글로 옮기려니… 저 처럼 내공 없고, 실력 없는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크크크. ㅠ_ㅠ 억지로 옮기면 “가부장제 문제: 십대 폭력과 피해의 젠더화된 이론을 향하여” 정도입니다.

체스니-린드는 관련 주제어로 검색하기 전까진 전혀 모르던 사람인데요. 이번에 이런저런 논문을 찾고, 읽는 과정에서 청소녀-일탈/불량-구금시설 관련해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더군요. 마찬가지로 브라운과 스틴도 유명인들이고요. 제게 좀 더 익숙한 이들로 비유하자면, 게일 러빈, 주디스 버틀러, 스잔 스트라이커가 공동으로 논문을 쓴 격? 아니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이 협력해서 신제품을 출시한 격? 혹은 네이버, 다음, 네이트가 협력해서 새로운 포털을 만든 격? 흐흐. 뭐, 대충 이 정도의 느낌을 주는 공저자들이 모인 논문입니다. 물론 이런 기획에 따른 문제도 많을 테고, 제가 아직 모르는 분야라, 이런 비유가 문제가 많긴 하겠지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적어도 체스니-린드의 경우 꽤나 괜찮은 논의를 펼치는 저자란 점이죠. 다른 논문을 읽고 호감을 느껴서 이 논문도 읽기로 했으니까요. 🙂

체스니-린드는 단독저서보다 공저가 많은 듯한데요. 다른 공저 논문에선 여성의 폭력이 좀 더 관계적이란 식의 표현, 덜 폭력적이란 식의 표현이 기존의 여성성을 반복하고, 강화할 수 있음을 지적해서 인상적이었죠. 현상적으로 그렇다 아니다를 떠나서, ‘더 관계적이다’, ‘남자/소년에 비해 덜 폭력적이다’란 표현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지적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브라운 등이 함께 쓴 이번 논문 “Patriarchy Matters”는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야 할까요? 십대여성 혹은 청소녀의 범죄 및 구금과 관련한 논문에서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항은 1990년대 들어 여성범죄율, 청소녀 범죄율이 상당히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미국 논문과 한국 논문에서 공통으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고요. 경찰청, 교정시설 등에서 제시하는 통계 역시 이것이 사실이라고 증명합니다. 십대여성의 체포율이 상당히 증가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재밌는 건, 1990년대 들어서면 ‘여성’과 ‘남성’에 관계 없이, 폭력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란 점입니다. 폭력은 줄어들고 있는데, 범죄율은 증가한다? 브라운 등이 쓴 이 논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논의를 출발합니다. 페미니즘/여성주의/젠더관점에서 접근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의 논문들이 여성의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언급하지만 폭력은 감소하고 있음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의의는 상당합니다. 저자들은, 폭력이 감소하는데 체포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건 다른 무언가가 변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것은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이 변한 점과 관련 있다고 주장합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두 가지. 과거엔 젠더 차이를 강조하며 여성을 통제했다면 지금은 젠더 동등을 강조하며 여성을 통제하고 있으며, 과거엔 여성 섹슈얼리티를 통제했다면 지금은 여성 폭력을 통제하고 있다는 거죠.

전자의 경우, 과거엔 여성과 남성은 다르기에 여성의 가사노동은 당연하단 식으로 여성을 통제했죠. 하지만 지금은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니, 젠더 범주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여성의 행동을 통제합니다. 즉, 현대사회는 더 이성 성차별이 없다는 식의 접근이죠. 그래서 성폭력, 젠더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폭력을 그냥 개인 간의 폭력으로 대한다는 거죠.

후자의 경우, 과거엔 여성이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면 그것을 처단하는 식으로 여성을 통제했죠. 마녀란 이름으로 부르거나, 무성적인 존재로 여기며 여성의 성적 표현을 억압하여 여성을 통제했다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특정 행동을 폭력으로 명명하고 그것을 못 하게 하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통제한달까요? 이를테면 작년 말, “루저의 난”으로 불렸던 키와 관련한 논쟁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 여성을 법원에 고소할 정도로 엄청난 테러가 있었는데요. 특정 발언을 폭력으로 명명하고, 그것에 테러를 가해 여성성을 통제하는 거죠. 그러니 이젠, 성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폭력이냐 아니냐로 명명하는 방식이 바뀌었고, 전통적 젠더 역할에 위배될 때 그것을 폭력으로 명명하고 처단하는 식이죠.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을 “내가 미니스커트 입은 모습에 불쾌함을 느꼈으니, 성희롱이고 (성)폭력이다”란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단적인 예가 되겠죠. 폭력이란 명명이 상당히 포괄적인 표현이듯, 여성의 행동을 폭력으로 명명할 때 젠더표현부터 섹슈얼리티 실천까지 거의 모든 행동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의 결론은 다소 뻔합니다. 젠더가 인종이나 계급, 성적지향 등과 별개일 수 없으니 여러 범주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충분한 사례와 분석을 제공하고 있어서 공허한 결론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진부한 결론이긴 하지만, 논의를 차근차근 따라 읽노라면 꽤나 감동적입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겐 익숙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던 부분을 잘 정리하고 있으니 유용하기도 하고요. 흐흐. 여성성 통제와 관련해서 참고문헌을 찾고 계시다면 읽으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치명적인 문제는 영어논문…ㅠ_ㅠ (그렇다고 제가 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길 의향은 없습니다. 그 시간이면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을 옮길 수도 있으니까요. 흐흐. 그렇다고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도 아니지만요… 음하하;;; )

의외의 발견: 동성애 관련 논문들

예전에 전자사전을 쓰지 말고 종이사전을 사용하란 요지의 글을 읽었다. 이제는 출처도 저자도 다 잊은 글이다. 종이사전을 추천한 이유는 간단한데, 전자사전은 원하는 단어만 찾지만 종이사전은 단어를 찾으려고 페이지를 넘기는 과정에서 의외의 단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나. 의외의 발견에 강조점을 찍은 글이었다. (잠깐 딴 소리하면, 난 전자사전을 쓰지만 종이사전을 더 좋아하는데 종이사전엔 필요한 정보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의외의 발견은 인터넷서점과 오프라인서점 혹은 도서관의 차이기도 하다. 구매를 결정한 책만 검색하는 인터넷서점에선 의외의 발견을 하는 경우는 드문 듯하다(나의 습관때문 이겠지). 물론 관련 서적을 제공하는 인터넷서점도 있지만, 그 서비스에 도움을 받은 적은 별로 없으니 생략. 하지만 오프라인 서점이나 도서관은 다른 듯. 도서관에 가면 도서반납대에 있는 책을 훑어 보는 걸 좋아한다. 내 전공서적이나 관심 도서가 있는 서가에선 대개 예측할 수 있는 책들만 만나지만, 반납대에선 의외의 책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에 구비할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보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생은 다른 분이 다 했고, 나는 약간의 추가 작업을 하는 정도다. 근데 이런 작업에서도 의외의 발견을 할 수 있어 즐겁다. 정리해야 하는 자료들은 모두 퀴어와 관련 있지만, 퀴어와 관련 있다고 모든 자료에 다 관심 있는 건 아니다. 평소라면 아무래도 조금 더 관심 있는 주제의 책들을 주로 읽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 권, 한 권 정리를 하다 보면 평소엔 관심이 없는 주제의 책들도 훑는 기회가 생긴다.

오늘 찾은 의외의 발견은 나치독일의 동성애 탄압과 아리안 민족성 형성의 관계를 다룬 논문이다. 자세히 읽은 건 아니고 논문요약과 목차 정도만 읽었는데 꽤나 흥미롭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현재의 범주로 환원해서)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서, 집시와 같은 이들도 탄압했고 말살정책에 따라 많은 이들을 죽였다. 조일구씨가 쓴 이 논문은 그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나치의 한 관리가 남성 동성애자들을 탄압하는 방식으로 독일인의 남성성을 형성하고, 이 과정을 통해 아리안족을 남성의 신체로, 남성다움으로 재현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고 조일구씨가 요약했다). 예전에 한국의 군입대 경험과 국민국가 형성을 탐구한 논문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기에, 동성애 탄압과 아리안족(더 정확하게는 독일 남성성)의 민족성 형성의 관계를 밝히는 논문을 기대하고 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아니 시간 내서 읽어야 할 듯. 근데 이렇게 기대하고 읽었는데 내용이 별로면 어떡하지? ;;;

다른 한 편, 국내에 있는 여러 신학대학에서 동성애를 주제로 다룬 논문이 의외로 많아 놀랐다. 워낙 보수적인 기독교의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관련 논의가 없을 줄 알았다. 근데 아카이브에서 소장하고 있는 논문만 13편 정도다! 그 중 몇 편은 대충 읽었는데, 읽다가 박장대소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성서의 맥락에서 동성애를 죄로 여기지 않는 입장과 동성애를 죄로 여기는 입장을 개괄한 후 동성애를 죄로 여기지 않는 입장을 비판한 후 동성애는 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성애자가 아무리 죄인이라해도 그들을 내쳐선 안 되고 감싸고 어떻게든 이성애자로 전향하도록 애써야 한다고 주장하며 적절한 목회상담 방법을 나열한다. 내가 웃었던 건, 이들의 글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어찌나 진지하게 염려해 주시는지 웃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한 태도,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심각하게 염려하지만, 그런 태도가 웃기다는 걸 알까? 한 가지 더 웃긴 거. 목차를 훑다가 깜짝 놀랐는데, 상당히 많은 논문들이 목차부터 내용까지 비슷하다. 미묘하게 다르고 대체로 비슷하다. 그래서 첨엔 내가 실수로 같은 논문을 다시 집은 줄 알았다. ㅡ_ㅡ;;

암튼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을 즐기면서. 🙂

논문과 단행본?

지난 일요일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는데 ㅈㅎ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예전에 받은 논문을 읽고 있는데 단행본을 내란 내용이었다. 그냥 예의상 하는 말로 넘겨들었다. 그럴 내용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내 논문에 대한 나의 평가는, 글쓴이의 주장이 없는 발제문이니까. 그래서 그냥 잊었다.

ㅈㅎ님과 같이 하는 프로젝트가 있어, 어제 모처에서 만났다. 근데 논문을 책으로 내라는 얘길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하는 거다. 일요일에 받은 문자를 빈말로 들었기에 조금 놀랐다. 좀 정리를 해서 단행본으로 나오면 여성학 교재로 정말 좋겠다고. 조금만 쉽게 풀어 쓰면 학부와 석사초급과정 교재로 좋겠다는 말과 함께. 논문의 현실과는 별도로, 이 정도의 평가에 황송할 따름이다.

재밌게도, ㅈㅎ님의 얘기를 들으며 내 논문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내 논문에 무얼 기대한 걸까? 다소 혼란스러웠다. 나의 평가대로 발제문이라면, 발제문 역할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건 아닐는지. 논문을 쓰기 전엔 정희진 선생님의 석사논문수준을 욕망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하잖아(『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가 정희진 선생님의 석사논문이다ㅠ_ㅠ). 현재 한국에서 젠더를 논의할 때 많은 경우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거나 책 말미에 덧붙이는 식이 대부분이다. 관련 문헌을 찾거나 접근하기도 쉽지 않는데, 상당수가 외국어거나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자료집이나 보고서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트랜스젠더 이론을 중심으로 젠더 논의를 재배치한 책이 한 권 정도 있다면, 어떤 식으로건 쓸모가 있지 않을까? 『젠더 트러블』을 쓸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음을 아는 상황에선 간단한 입문서 정도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3년 전부터 미국의 트랜스젠더 이론을 정리하는 책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어 굳이 내가 낼 필요가 없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뭐, 이런 고민을 했다. “인세 계약을 하면 일 년에 10만 원 정도의 인세는 들어오지 않겠냐”란 말에 “그럼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생활비는 벌 수 있겠어요”라는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흐흐. 근데 정말 준비해볼까?

사실 이 모든 고민과 농담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건 내 논문을 책으로 낼 출판사가 있을 리 없다는 것. 으하하. 내 논문을 책으로 낼 출판사가 없다는 걸 확신하니 이런 망상도 하는 거다. 크크크. (결국 자학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