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중심성

어떤 행사가 LGBT라는 이름을 걸고 있음에도 그 내용이 동성애 중심이거나 동성애-비트랜스젠더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혹은 내용의 대부분이 바이나 트랜스젠더를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곁다리로 언급하는 수준이라면 이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만약 바이나 트랜스젠더를 논하고 있음에도 동성애-비트랜스젠더의 ‘입장’ 혹은 오랜 편견(혐오)을 밑절미 삼아 주제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면 이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LGBT 행사에 바이나 트랜스젠더 주제가 적은 것은 바이나 트랜스젠더 이슈로 얘기할 사람이 없거나 그 이슈로 발표하겠다고 지원한 사람이 단지 없어서일까? 나는 종종 궁금하다. 이런 문제는 단지 동성애-비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의 소극적인 성격이나 상대적으로 인적 구성이 적다고 얘기하는 문제(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렇게 주장한다)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아니면 어떤 구조적 문제 때문일까?
물론 나 자신은 소극적 성격이라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고, 능력도 떨어지고 할 얘기도 별로 없으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동성애-비트랜스젠더가 아닌 모든 사람이 소극적이고 할 얘기가 별로 없거나 기획력이 별로 없는 것은 아니리라. 분명 어떤 트랜스젠더는, 어떤 바이는 할 얘기가 많을 것이다. 내가 아는 많은 바이와 트랜스젠더는 할 얘기가 많다. 그렇다면 내가 알지 못 하는 어떤 연유로 기회를 못 가졌을 가능성도 상당하리라. 이를테면 기획 단계에서부터 비동성애-트랜스젠더는 덜 고려되거나 충분히 사유되지 않는 것과 같은 문제로. LGBT라고 말하면서도 LGBT로 사유하지 않는 문제로.
뭐, 이런 식의 어떤 궁시렁거림을 이렇게 끼적거려도 괜찮을까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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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떤 말이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단팥죽을 먹으러 가서 소금죽이 나와서 묵묵히 먹다가 계산하고 나오는 인간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시덥잖은 말까지 참지는 않는다. 어떤 말이건 할 수 있다고 해서 시덥잖은 말을 참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동성애규범성의 만연, 퀴어이론서의 필요

01

1월에 총 24개의 글을 작성했습니다. 우와아!!! 2011년 1월 이후 월 포스팅 20개 넘은 건 처음입니다. 으하하.
02
어제 강의를 들으며 다시 확인했지만, 걸커(걸어다니는 커밍아웃), 걸아(걸어다니는 아웃팅), 티부(티나는 부치)와 같은 언설은 동성애규범성 논쟁을 촉발한다. 동성애규범성은 바이/양성애, 트랜스젠더 등을 배제하거나 누락하는 이슈일 뿐만 아니라 특정 양식의 실천만 동성애에 적합한 것으로 다루고 그렇지 않은 다양한 실천을 배제하는 이슈다. 특정 행동 양식의 동성애자를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일이다. 동성애자 공동체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자가 아닌 퀴어 공동체(양성애/바이,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트랜스젠더 등)에게도 문제가 된다. 이를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03
KSCRC 아카데미를 들으며 한국 맥락에서 쓴 퀴어이론서가 있어야겠다는 고민을 했다. <남성성과 젠더>, <성의 정치 성의 권리>가 괜찮은 퀴어이론서지만, 책 제목이 퀴어이론을 표명할 뿐만 아니라 목차 역시 퀴어 이슈에만 좀 더 초점을 맞춘 것을 원한다. 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에이즈 이슈를 다루는 글 각 두 편씩 묶어서 책으로 낼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가능하다면 장애퀴어 이슈도 한 편 정도 있어야 하겠고).
미국의 경우 1990년대 중반부터 퀴어연구, 퀴어이론이란 제목의 선집이 다량 출간되었다. 그 중 나름 괜찮다고 평가하는 것은 Brett Beemyn과 Mickey Eliason이 엮은 Queer Studies: A 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Anthology다. 초기 퀴어이론 선집이 레즈비언과 게이 중심이었다면, 비민과 엘리아슨의 선집은 레즈비언과 게이 중심의 퀴어이론을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그래서 끼워 넣기 식으로 바이와 트랜스젠더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 바이와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퀴어이론을 재구성하는 글이 여럿 있다.
한국에서 퀴어이론서가 나온다면 비민과 엘리아슨의 선집을 모델로 삼고 싶다. 동성애 중심으로 퀴어 이슈를 논하는 분위기, 퀴어 모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당연히 레즈비언 아니면 게이라고 여기면서 바이와 트랜스젠더는 누락되거나 배제되는 분위기에 문제제기하는 맥락에서 책의 방향을 잡고 싶다. 예전 같으면 누가 이런 방향으로 책 기획을 하면, 그리고 내게 함께 하자고 하면 같이 해야지, 했는데 요즘은 좀 변했다. 내가 원하는 책을 누군가 기획해주길 기다려봐야 아무도 안 하더라.;;; 그래서 원하는 방향의 책이 있으면 직접 기획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달까. 하지만 혼자는 할 수 없는 법. 누구 저랑 같이 이 책 기획하실 분 계신가요?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을 말하기

수업시간에 나눈 얘기인데 여기서도 공유하면 좋겠다 싶어 글로 정리합니다.

작년 가을 <여/성이론>에서 이론가 소개글을 청탁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이론가는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고 하앍하앍하는 이론가지요. 후후. 수잔 스트라이커가 논한 트랜스젠더 이론을 소개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어찌하여 글은 지난 여름에 나왔습니다.
스트라이커를 소개해야겠다고 결정했을 때, 무엇을 소개할지는 쉽게 정했습니다. 스트라이커 글에 꾸준히 드러나고 있는 세 개의 주제,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트랜스젠더 역사, 그리고 동성애규범성. 앞의 두 가지는 제 연구와 공부 맥락에서 이제는 소개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저 자신, 트랜스젠더 이론을 공부하며 트랜스페미니즘 혹은 트랜스젠더 페미니즘에 초점을 맞췄고 거의 모든 글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아울러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쓰겠노라고 떠들고 있고, “캠프 트랜스”를 출판하기도 했고요. 그럼 동성애규범성은? 전 이 부분에서 조금 고민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얘기해야 할 논의지만 자칫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트랜스젠더 운동에 참여하면서, LGB와 함께 운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성적소수자 혹은 퀴어가 동성애자로 대표되는 현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고민이었습니다. 어떤 모임에서, 트랜스젠더와 바이가 있는 자리인데도, “우리 동성애자들”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마치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동성애자로 환원해버렸습니다. 그 환원은 트랜스젠더면서 레즈비언이거나 게이인 경우를 포함하는 뉘앙스는 아니었습니다. 동성애가 LGBT 혹은 퀴어의 대표 혹은 동의어로 쓰이면서 트랜스젠더와 바이가 누락되는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물론 당시 활동했던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에서 단체 차원으로 문제제기를 했고 조금 바뀌긴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우리 동성애자’란 언설은 여전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우리 트랜스젠더”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마 이렇게 발언했다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트랜스젠더만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성애가 퀴어와 등치되고, 성적소수자와 동일시되거나 대표 형상으로 재현되는 이 상황에 어떤 식으로건 지속적 개입이 필요했습니다. 누구의 경험을, 어떤 범주를 전면에 내세우고 대표적 형상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얘기할 자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동성애규범성을 말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규범적 이성애가 아닌 모든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 실천을 동성애로 환원하고, 특정 동성애 실천을 제외한 다양한 퀴어 실천을 배제하고 은폐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동성애규범성 논의가 필요했습니다. 트랜스젠더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역사가 제 연구 주제라서 소개하고 싶었다면, 동성애규범성은 운동 맥락에서 더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개인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활동가는 제 역할 모델이고, 어떤 활동가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활동가는 트랜스젠더 및 젠더 이슈에 매우 민감하고… 하지만 집단적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죠. 그렇다면 이 지점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기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글 한 편 출판한다고 관련 논의를 제기할 장이 마련되지는 않습니다. 글 출판은 그냥 글 출판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글 출판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업이니까요. 반드시 지금, 동성애규범성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기 전에 관련 논의가 본격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