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밀한 유혹Affinity

[은밀한 유혹Affinity]를 꼼꼼하게 살폈다. 세라 워터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Tim Fywell 감독이 만든 영화다. 폐막작이라 다행이었다. 일요일에 상영하는데 자막 작업이 토요일 낮에 끝났거든-_-;; 아쉬운 건, 미리 홍보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 단연 최고였는데!

영화를 15분 정도 남겨뒀을 때까지만 해도, 난 이 영화와 관련해서 쓰고 싶은 글은 다음과 같았다.

트랜스젠더 범주를 정의하는 문제는 상당히 많은 논쟁을 유발한다. 누구의 입장을 반영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범주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 학제의 맥락에서 트랜스젠더는 규범적이지 않는 젠더 표현을 실천하는 이들을 아우른다. 물론 여기서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트랜스섹슈얼, 퀴어, 레즈비언, 게이, 바이, 드랙, 크로스드레서, 간성,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호한 사람 등을 아우른다. 어떤 이들은 이 정의를 미국 백인에 제한한다. 다른 이들은 인도의 히즈라, 미국 원주민의 두 영혼의 사람들(버다치로 알려진), 동남아 지역의 카토이 등을 아우르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폭넓게 적용하는 몇몇 활동가들과 역사학자들은 잔다르크를 트랜스젠더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확장할 수 있을 때까지 확장하면, 한국의 무당도 트랜스젠더일 수 있다. 물론 이는 미국의 백인 중심, 학제 중심의 해석이다. 그나마 이런 정의가 그들의 학제에선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란 말은 상당히 골치 아프다. 일단 학제에선 합의 과정은커녕 아예 관심 밖이다. 그리고 이 용어를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합의가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그래서 더 즐겁기도 하다. 생생하니까. 각자의 입장을 좀 더 활발하게 드러낼 수 있으니까. 어떤 의미를 암기하는 식으로 배울 필요 없이 개개인의 경험 속에서 정의할 수 있으니까.

용어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비규범적인 방식으로 젠더를 표현하는 이들로 정의하고, 무당까지도 포함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영화 [은밀한 유혹]은 트랜스젠더 영화로 해석할 수 있다.


난 이 영화의 감상문을 이런 내용으로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15분을 마저 살폈을 때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트랜스젠더 실천’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표면적으로 레즈비언 관계를 다루는 이 영화를 트랜스젠더 영화로 독해할 수 있었던 건 어째서일까.

줄거리를 대충 쓰면, 일단 시대적 배경은 1870년대. 셀리나 도즈란 영매가 살인죄로 여자 감옥에 갇혀 있다. 이 감옥에 마가렛이 수감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을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도즈를 만난다. 둘은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고, 마가렛은 영매들의 세계를 배워간다.

[현재 이 영화는 개봉하지도 않았고 개봉 일정도 잡히지 않은 것 같으며, 책도 한글로 옮기지 않은 상태라 스포일러 남발합니다. 알아서 피하세요. :P]

내가 주목한 부분은 도즈의 영이 피터란 남성적인 존재란 점이다. 무당으로 치면, 주민등록번호 2번인 무당이 모시는 신이 주민등록번호 1번인 사람이랄까? 여성과 남성으로 개인을 분명하게 나누는 사회에서 도즈와 피터는 서로 다른 성별 번호를 부여 받은 사람이다(이런 설명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당시 서구에서 이런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건 아니다). 피터는 도즈의 몸을 매개하고, 이 과정에서 도즈는 피터를 체화해서 피터로 행동한다. 도즈가 피터를 불러들이지 않을 때와 피터를 불러 들여 도즈의 몸을 매개로 피터로서 말을 할 때, 도즈의 목소리부터 행동까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변하는데 이 과정이 묘하게 성별 전환과 닮았다. 비록 피터를 통한 젠더 전환/변화가 ‘영구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시적인 사건’이라 해도 나는 이것을 트랜스젠더스러운 실천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아울러 피터가 도즈의 영으로서 평생 함께 한다면, 이 또한 ‘영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도즈는 접신 경험을 통해 ‘남성다움’을 실천한다. 주변 사람들이 도즈가 영매란 사실을 알고 경외하는데, 이를 통해 도즈는 빅토리아시대의 여성다움을 실천하지 않는다. 이는 도즈의 젠더 실천을 상당히 흥미롭게 해석할 여지를 준다. 그렇다고 내가 이 영화를 레즈비언과 ftm/트랜스남성간의 경계분쟁을 논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미국 학제의 개념으로서 트랜스젠더 실천이 상당히 일상적으로 발생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다른 한편,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로 영을 소환했다는 혐의도 강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영에 씌어서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도즈는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자신이 살인한 것이 아니라 피터가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접신 상태에서 피터를 통제할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피터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이는 도즈의 젠더 실천이 규범적이지 않아도 무방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즉, 도즈는 자신을 영매로 소개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행동이 상당히 자유로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스포일러. 영화의 핵심이기도 함]

문제는 후반부 10분 정도를 남겨 놓고 등장하는 반전에 있다. 도즈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선 자신의 접신 경험을 공연한다. 이때 도즈 뒤에 피터가 등장하고 도즈의 입을 매개로 말을 한다. 근데 피터는 사실 도즈의 파트너, 바이거스였다. 바이거스가 피터로 분장해선, 영혼인 것처럼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 이렇게 되면 도즈가 영매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도즈가 진짜 영매인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도즈는 자신을 영매로 소개함으로써 사회에서 공인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동시에 행동 제약이 줄어드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이제 방점은 바이거스의 행동에 찍으면 된다.

바이거스는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인물이지만 실제 등장하는 분량은 상당히 적다. 배후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기에 사건을 조율하고 지배하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국에 머물 때의 드라큘라를 닮았기도 하다. 일종의 안개 같은 역할이다. 그래서 바이거스의 행동을 분석하는 건 쉽지 않다. 그저, 피터로 분장했을 때 바이거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적어도 영적 사기를 위한 단순한 도구 같지는 않다. 피터가 바이거스가 분장한 인물이란 게 밝혀지는 사건에서, 피터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지!”란 말을 한다. 바이거스는 항상 도즈 옆에서 살았기에 피터가 특별히 멀리서 온 건 아니다. 피터의 모습으로 분장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아주 멀리서 온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분장에 걸리는 시간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피터로서 바이거스와 하녀로서 바이거스, 도즈의 파트너로서 바이거스가 상당히 다른 자아들이란 걸 암시한다. 적어도 피터로 변해서 나타난 바이거스는 피터로 변장했거나 분장한 바이거스가 아니라 피터, 그 자체이다. 이런 점에서 피터/바이거스의 변환 관계 역시 의미심장하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도즈와 피터/바이거스가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어떤 행동을 트랜스젠더스러운 실천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런 게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영화 속 시대를 살고 있는 비규범적인 존재들이 생존을 위해 사용한 전략들이 중요하다. 그 전략들은 그 사회의 규범과 규범의 허점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암튼, 정말 흥미롭고 재밌는 영화다. 정식 개봉을 안 한다면 비공식 개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흐흐.

[영화] 캔디레인, 노 엔드, 뉴 월드: 퀴어영화제 SeLFF 상영작

헝 아이 첸Hung-I Chen [캔디 레인]
로베르토 쿠질로Roberto Cuzzillo [노 엔드]No(End, Senza Fine)
Etienne Dhaene [뉴 월드](The New World, Le Nouveau Monde)

어제까지 퀴어영화제, SeLFF에서 상영하는 세 편의 영화를 꼼꼼하게 살폈다. 말 그대로다. 어떤 영화는 5분 정도의 분량에 한 시간이 걸렸다. 어떤 일로 꼼꼼하게 살펴야 했다. ;;

[캔디 레인](Candy Rain)을 살피는 시간은 내내 유쾌했다. 이야기와 영상 모두 감각적이다.
[캔디 레인]은 기본적으로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행복한 사람,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 함께 하고 싶지만 함께 할 수 없어 불행한 사람,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있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 이렇게 네 종류의 사랑 이야기가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 영상의 색채가 같은데도 에피소드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는 건 이 영화만의 매력이지 않을까 싶다. 네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개그코드는 완전 내 취향이다. 흐흐. 살피는 내내 계속해서 키득 거리며 웃었다. 어떤 장면에선, 앉아 있는 장소가 도서관 혹은 공공장소란 사실을 잊고 박장대소를 할 뻔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연신 웃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와 네 번째 에피소드에 공감했다.
소개글은 여기

다른 두 편은 인공수정과 아동양육 이슈와 관련 있다. 파트너 관계에서 아이를 갖기로 결정하고, 아이를 갖는 방법을 결정하는 과정은 다양할 테다. 어떤 이들은 의료과정을 거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입양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대리모’를 고용할 수도 있고, 그리고 …. 두 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이슈를 전하고 있다.

[노 엔드](No End, Senza Fine)는 인공수정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공수정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건 깔끔하게 줄였다. 인공수정을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다뤘다. 아이를 갖기로 했을 때, 부모의 반대를 직면할 수도 있다. 이건 두 영화 모두 같다. 문제는 인공수정을 하기 전에 파트너에게 죽을 수도 있는 병이 생겼을 때,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유사한 주제를 다룬 영화들에서, [노 엔드]의 변별점은 이 부분이다. 아이를 갖기로 합의했는데, 파트너가 죽을 수도 있는 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참, 이 영화에선 인공수정 방법으로 의료기술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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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월드](The New World, Le Nouveau Monde)의 초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 후 이성애가족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해소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정자를 제공한 ‘아버지’의 문제다. 레즈비언 관계에서 임신을 한 사람과 정자를 제공한 타인은, 현재의 가족개념에서 어떻게든 연결이 된다.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 사람은 엄마로 불릴 것이고, 정자를 제공한 사람은 아빠로 불릴 것이다. 그럼 임신한 사람의 파트너는? 아이의 엄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빠인 것 같기도 하고, 아이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한 완전한 타인 같기도 하다. 정자를 제공한 이가 ‘아버지’로서 자신의 역할을 요구한다면 파트너의 소외는 가중된다. 이 영화는 이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영화에서 선택한 인공수정 방법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꽤나 코믹하다. 놓치기 아쉬울 수도 있다.
두 영화를 살피면서 인공수정이슈와 파트너 관계에선 임신을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개입이 필요한 관계를 새롭게 고민할 수 있었다. 공동체, 관계, 아동양육, 인공수정, 출산, 엄마노릇, 아빠노릇과 같은 이슈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상당히 흥미로울 듯하다. 커밍아웃이란 주제에 관심 있다면 [뉴 월드]의 몇 장면들이 인상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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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세 편의 영화를 살핀 후, 좋은 영화의 기준이 조금 바뀌었다. 이야기가 탄탄하고 편집이 잘 된 영화가 좋은 영화일 수 있지만, 이제부턴 대사가 적은 영화가 좋은 영화다. ㅡ_ㅡ;; 아, 무성영화 만세!! ;;;;;;;;;;;;;;;;;; 흐흐.

이쯤해서 고백하자면, SeLFF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자막을 제작하고 있다. 덕분에 네 편의 영화를 미리 살피는 행운을 잡았다. 위의 영화 평은 준 내부자의 입장에서 쓴 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호하다. 아마 단순 관객으로 영화를 접했어도 비슷한 글을 썼을 거 같다.

포스터 및 프로그래머 추천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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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성애”일까, 혹은 “이성애”란 존재하는가

며칠 전에 영화 [300]과 관련한 글을 한 편 올렸다. 수업시간에 제출한 쪽글이었고, [300]과 관련한 부분만 올리면서 [음란서생]과 관련해서도 적었다는 내용을 썼다. 엄밀하게 말하면 쓰다가 말았는데, [음란서생]은 결코 [300]처럼 얘기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음란서생]의 주요 등장인물 중, 연애의 한 축을 형성하는 인물은 윤서(한석규)와 정빈(김민정)인데 처음엔 이 둘의 관계를 “이성애”로 설정했다. 소위 말하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지칭하는 그런 방식으로, 안일하게. 이들을 “이성애”로 설정 해야만 [300]처럼 뭔가 “깔끔”하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텍스트 맥락에서도 그러하고 루인의 고민에서도 그러하고.

정빈과 윤서를 간단하게 “이성애”라고 부를 수 없었던 건, 계급과 신분 자체가 다른 둘 사이의 연애를, 단지 “여성”과 “남성”으로 간주되는 인물들이란 이유로 “이성애”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이 둘의 관계를 간단하게 “이성애”라고 부른다면, 이 둘이 지속적으로 연애를 하는 한 그 연애는 “신분과 계층을 뛰어넘는 지순한 사랑”이란 식의 언설로 반복되거나, 직접 이런 언설로 얘기하진 않는다 해도 은연중에 이런 암시를 할 위험이 있다. 그리하여 이런 식의 설명은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신분과 계급 차이는 “이성애”라는 젠더-섹슈얼리티에 있어 부차적인 것으로, 젠더-섹슈얼리티만이 본질적이고 인간사에 있어 가장 강력하고 핵심적인 것으로 간주할 위험이 있었다.

과연 계급과 신분이 다를 때에도 “이성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종차별이 극심한 나라에서 다른 인종간의 “여성”-“남성” 연애, 민족차별이 극심한 나라에서 다른 민족간의 “여성”-“남성” 연애를 간단하게 “이성애”로 범주화할 수 있을까?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이른바 “연상녀-연하남”이란 관계를 “이성애”란 식으로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성애 규범”이 요구하는 조건에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여성”과 “남성”의 관계란 이유로 “이성애” 범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좀 더 힘든 이성애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성애”란 식으로 말하면 그만일까?

이런 질문/의문은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비이성애자”들은 젠더-섹슈얼리티로 인해 차별받고 있다는 언설을 통해 마치 “이성애”는 별 다른 어려움 없이 편하게 관계를 맺어간다는 식의 효과를 낳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성애”가 있다고 가정할 때, 장애인의 “이성애” 관계는 비장애인의 “이성애” 관계와 동일하게 “이성애”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부를 수 있다면 어째서이고 없다면 어째서일까?

“이성애”란 무엇일까? 소위 말하는 “이성애주의” 혹은 “이성애 규범”은 존재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 작동하게 한다 해도, 이런 “이성애주의”나 “이성애 규범”이 말하는 그런 “이성애” 관계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가 요즘 하고 있는 고민 중 하나이다. “이성애”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다고 해서 정말 그런 “이성애”가 실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퀼트”처럼 엮어가며 구성하는 ‘정체성’을 젠더-섹슈얼리티로 환원하고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란 식으로 간단하게 규정하며 이런 가정을 통해 분석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만약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이성애”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자신은 mtf가 아니라 트랜스여성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자신은 트랜스여성이 아니라 mtf라고 말하는 사람의 연애, 즉 트랜스여성-mtf 관계는 “이성애”일까 “동성애”일까? 루인은 트랜스라고 얘기하는 편인데 그럼 루인의 연애는 “이성애”일까 “동성애”일까? 그냥 “퀴어”일까?

같은 젠더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동성애”, 다른 젠더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이성애”라고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를 끊임없이 “여성”과 “남성”의 관계로만 환원하는 방식, “여성”과 “남성”의 관계만을 “이성애”라고 설명하는 방식, 젠더는 오직 둘 뿐이고 그렇기에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란 방식으로 젠더-섹슈얼리티를 간단하게 구분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그런 관습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자 하면서도 [음란서생]을 분석하면서 간단하게 정빈과 윤서를 “이성애”로 가정하려는 루인을 깨달으며, 좀 많이 웃기다고 느꼈다.

더구나 루인에게 이들 관계를 “이성애”라고 명명할 권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루인이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남들은 “이성애”라고 간주할 때에도 자신들은 “이성애” 관계도 “동성애” 관계도 아니라고 얘기하는데. 뭔가 전선을 형성하고 싶어서, 너무도 간단하게 범주설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루인에게 계속해서 묻고 있다.

아…, 낚시 바늘만 잔뜩 던지곤 도망치는 글이다-_-;;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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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글에 답글을 쓰면서 두루뭉실했는데, 그 두루뭉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해요;;; 헤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