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글 수정하기, 고마움

마지막 문장을 쓰곤, 스스로 감동 받았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에 실릴 원고 중, 파일명으론 “정체성 명명과 경계지대”, 현재 수정한 제목은 “범주와 명명, 그리고 경계지대”. 물론 최종 제목은 또 다르겠지. 오늘 저장한 파일이 take8이니, 그 전에 10개의 다른 원고들이 있다는 의미인데, 앞서 쓴 10개 원고들에선 얼버무리며 넘어갔던 부분들, 혹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긴 부분들을 채워 넣었다. 그러며 루인의 생애사가 상당 부분 들어갔다. 이곳, [Run To 루인]에도 쓰지 못한 얘기들이 그 글 속에 너무도 많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쓰면 꼭 황색신문 같다. 일테면 “루인, 충격고백”처럼 -_-;;; 크크크)

take7에서 take8로 넘어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실제 날짜 상으론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글 한 편 수정하겠다며 며칠을 붙잡고 앉았다는 점에선 오래 걸렸다. 보통은, 수정하겠다고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서 끝내기 때문이다. 참 많이 외면하기도 했다. 그냥 외면하고 싶었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을 마주하는 일,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 전시하는 일. 이런 일을 할 용기가 부족해서 자꾸만 미루기도 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냥 어물쩍 얘기해도 남들이 알아 줬으면 하는 바람을 품었다. 앞뒤 맥락 다 잘라버리고 한 마디, 툭, 내뱉는 것처럼.

배치를 바꾸기도 하고, 뺄 부분 빼고, 채워 넣을 부분들 채워 넣고 말을 덧붙이면서, 뭔가 전혀 다른 글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런 느낌은 오늘 저녁 혹은 내일 오후에 다시 수정할 때 여지없이 깨지겠지만, 적어도 지금 느낌은 그렇다. take7과는 많이 다른 느낌의 글.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추가하면서, 감동 받았달까. 참 민망한 말이다. 자기가 쓴 글에 자신이 감동 받는다는 건, 그 만큼 허접하단 의미거나 거리를 두고 건조하게 평가하지 못 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안다. 분명 퇴고하려고 글과 마주하는 순간, 비문에서부터 구조적인 문제까지,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나타날 거란 걸. 그리고 아직 수정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이 여기까지란 걸 인정한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결론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다시 읽고, “감동”의 크기가 반 토막 났다.)

이 글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는다면, 다른 무엇도 아닌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 성전환자란 용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는 지점이다. 물론 “이렇게 정의해야 한다”는 식의 내용은 없지만, 미국이란 맥락에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과 한국에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이 얼마나 다른지를 드러내려고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사서 읽으시면… 편집장님, 책 홍보 잘 하고 있죠? 흐흐 -_-;;;)

그러고 나면 루인의 생애사를 통해 정체성을 규정하거나 특정 범주(일테면, 게이냐 트랜스젠더냐 크로스드레서냐란 식)로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드러냈다는 점, 정도랄까. 따지고 보면 이 지점은 (한국에선 아직 별다른/활발한 논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루인이 읽은 영어논문에선 낯설지 않은, 때론 익숙한 논의들이다. 그렇다면 그 논의들과 어떻게 차별화를 꾀할 것인가가 관건이겠지.

그러고 보면 루인은 인복이 참 많다. 이성애혈연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겐 대인관계가 참 좁다는 말을 듣는데도, 그런 만큼이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있어서, 매일 조금씩 변태할 수 있다. 최근 쓰고 있는 몇 편의 글들 모두, 이런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며칠 전 출판회의 때, 편집장님이 “저자의 자기소개와 함께 thanks to도 넣을까 생각했어요”란 요지의 말을 했었다. 그 말이 맴돌아 괜히 누구에게 고마움을 표할까 떠올리니, 20명이 넘는다(블로그 이웃이 반 이상이다 흐흐). 인간관계 좁다고 말하면서도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만약 책에 정말 thanks to를 적는다면, 참 유치한 일이라고 민망해 하면서도 가득 채워서 적을 것 같다. 지금은 그냥, 이런 몸이다.

아, 저녁은 알바가 있다. 갑작스레 맡은 알바. 그곳에서 글을 수정할지 짧은 논문을 읽을지 결정해야 한다. 이제 슬슬 갈 준비를 해야지.

[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순박 혹은 “순정”이라고 불리는 폭력

[좋지아니한가家] 2007.03.08. 19:40, 아트레온 7관 9층 I-5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중 읽고 싶은 영화는 세 편. [훌라걸스], [행복을 찾아서] 그리고 지금 이 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이 영화감독의 전작인 [마라톤]은 아직 안 읽었다. 그래서 어떤 감독인지 모르는 상태이며, 이런 의미에서 루인에겐 신인감독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감독이지만, 개봉하기 전부터 몇몇 영화 관련 매체에서 많이도 띄운 영화기도 했다. 물론 관련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관련 기사가 많이도 나온 건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에 흥미가 생긴 건, 김혜수가 나온다는 거(물론 김혜수의 열혈 팬은 아니다, 그저 90년대 후반 라디오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 처음 알았는데;; 그때의 인상이 상당히 좋아서 아직까지 김혜수 하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이 재밌다는 거 정도랄까? “좋지 아니 한가”와 “좋지 아니 한 家”를 동시에 의미 하고 있어서 재밌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포일러는 기본
이 영화를 읽던 와중에, 불현듯 모든 판단을 중지해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코미디 정도의 장르일 이 영화는 불현듯 아주 불쾌한 영화로 바뀌었는데, 그건 아들 역할을 하는 용태(유아인 분)가 하은(정유미 분)에게 하는 말에서 비롯한다. 영화 초반에 용태는 하은의 집 앞에 가선, 하은이 원조교제(혹은 ‘청소녀’ ‘성판매’)를 하는 걸 알고, “창녀 같은 X야”라고 외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불쾌함은 그 다음에 찾아가선 뜬금없이 “모든 걸 다 용서 할께”라는 말로 바뀌고 그러고선 매일 찾아가선 용서한다고 말한다.

누가 누굴 용서하고, 누가 누굴 용서할 권리/권력이 있으며, 하은은 무슨 잘못을 한거지?

이 불쾌함 때문에, 용태의 이런 태도는 후반에 뒤집힐 줄 알았다. 아니 그런 걸 기대했다. 즉 마치 용태 자신에게 하은을 용서할 권리/권력이라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과도한 기대였고, 감독은 이런 용태의 태도를 끝까지 끌고 가고 이것을 사랑에 따른 “순정” 혹은 “순수함”으로 포장한다. 쳇. 불편함은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천진함 혹은 순수함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그렇게 의미화하는 것에 따른 해석이다. 얼마 전, 우연히 동영상을 한 편 보다가 중간에 끈 적이 있다. 그 동영상은 일본 방송 프로그램을 편집한 내용이었다. 우선 한 명의 흑인(지금 이 글에서 흑인이라는 말은 사실상 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사는 사람들을 싸잡아 획일화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이다, 다만 그 사람의 국적이 안 떠올라서;;;)이 나와서 자신의 나라는 스페인(?) 혹은 유럽의 어느 나라가 사실상 700년 가까이 침략해서 지배했지만 사과 한 마디 안 했다면서 일본이 한국을 35년 간 침략한 건 비교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한국인으로 추정하는 사람(그 사람은 정말 “한국인”일까?)이 35년이 아니라 36년이라고 정정하며 ‘차분’하게 식민지 기간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침략했다는 그것 자체에 문제제기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그 “흑인”은 ‘언성을 높이며’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읽다가 짜증나서 닫았는데, 그 짜증의 이유는 댓글들에 있었다. “한국인”은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데 “흑인”은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말한다는 내용들. (물론 일본식민지 경험과 관련해서 상상 가능한 댓글들 역시 수두룩했고!)

루인이라고 그렇게 느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해석할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왜냐면 그 사람이 사는 지역마다 감정이나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에 따른 반응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20년을 살고 대학부터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루인은, 루인의 말투로 인해 종종 씨니컬하다, 공격적이다, 라는 얘길 많이 듣는 편이다. 한동안은 루인도 스스로를 그렇게 설명하곤 했고 지금도 종종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지만 이는 단순히 루인 개인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얘기들을 듣는 와중에 깨달은 건, 재밌게도 정작 부산에선 이런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며 문득 떠올랐다. 지역에 따른 말투의 차이를.

부산에서 살다보면 종종 서울지역어를 비꼬는 얘길 자주 듣는다. 현재 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추적하면, 대충 “말투가 곱상한 것이 재수 없다”란 반응이 핵심이었다. 여기엔 당연히 양성이라는 성별이분법이 작동하며, “머시마가 재수 없게 말투가 그게 뭐냐”라는 반응들. 이에 반해 서울에 살며 자주 들은 혹은 방송을 통해 듣는, 부산이나 경상도 지역의 말투나 언어에 관한 내용은 공격적이고 쌈질 하는 것 같음이었다. 즉, 부산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꼭 싸우는 것 같다는 반응들. 물론 루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공격적이거나 씨니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루인의 말투나 루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지역색을 배제할 수 있을까? 적어도 루인이 아는 한 루인의 말투가 공격적이라고 말한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비부산, 비경상도 지역 출신이었다. 이것을 일반화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한국이라는 지역에서도 지역에 따라 말투가 다르고, 그래서 어떤 지역에선 일상적인 말투가 다른 지역에선 공격적이고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말투로 여겨진다.

그 “흑인”의 말투가 감정적이거나 공격적이라고 여겨진 건, 댓글을 단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하기 방식에 비추어 발생하는 반응이고, 여기에 한국의 극심한 민족주의, 일본에 가지는 열등감, 그리고 그 사람이 “흑인”이라는 것이 겹치며 발생한 반응임을, 동영상 아래 달린 댓글에서 느꼈기에 더 이상 그 동영상을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용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어떤 “순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루인에겐 용태의 행동이 상당히 폭력적으로 다가왔는데, 용태에겐 애시 당초 하은의 감정이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제멋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하은의 상황에 관심 없기로는 감독도 마찬가지인데 감독은 그저 엄마가 아프지만 약값도 없는 가난한 상황의 하은이라는 정도의 설명만 한다.) 용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순정” 혹은 “순박함”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행동양식에 자신을 맞춤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하은은 “원조교제”를 한다는 이유로 용태의 모든 행동은 더욱더 정당화 된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이 영화는 유쾌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하은의 반응은 언제나 무관심이고 그래서 용태의 행동은 튕겨나갈 뿐이다. 이 영화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점에 있는데, 하은의 무반응은 용태의 말을 수긍하는 동시에 무시한다. 즉, “그래서 뭐?” 끊임없이 쫓아다니면서 좋아한다는 용태의 말에 좋아하면서도 용태의 비난과 “용서”를 무시하는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용태의 행동이 얼마나 불편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낳는다. 용태의 아버지 창수(천호진 분)의 동영상을 본 후 하은을 찾아가 신경질을 내고 혼자서 나자빠지는 장면은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착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사실은 제멋대로의 행동일 뿐임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모든 사람이 이런 도덕적 판단에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
이 영화의 가족이 새롭지 않았는데, 이 영화 속 가족구도가 새롭다면 이는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지, 영화 속의 가족구조 자체가 새로워서는 아니다. 새롭다니? 너무도 익숙한 걸.

이 영화를 읽고 나왔을 때 이 영화를 가장 재밌게 읽으려면 다섯 번은 읽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캐릭터마다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고, 용선(황보라 분)이란 인물은 참 매력적인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시작하며 등장하는 용태와 하은의 관계는 다른 지점을 읽지 못하게 할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다시 읽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 읽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