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증, 공감하는 정치의 복잡함: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논문 한 편을 읽고 발제하기로 했다. 읽어야 하는 논문은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를 분석하고 있어서, 영화를 먼저 봐야했다. 10년도 더 전에 개봉한 영화란 걸 이제야 알았다.

이 영화가 유명하다는 건 알았지만, 내용은 전혀 몰랐다. 오늘 오전에 봤으니 오늘 처음 알았다. 강박증이 있는 로맨스 소설가(“이성애-비장애-백인-남성”) 우달, 천식인 아들을 돌보며 식당 종업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코넬리(“이성애-비장애-백인-여성”), 화가이자 우달의 이웃에 사는 비숍(“게이-비/장애-백인-남성”)이 주요 등장 인물이다. 괄호에 표시한 범주는 지금 읽고 있는 논문의 분석틀이라 표시한 것. 비숍은 게이-비장애-백인-남성에서 사고로 게이-장애-백인-남성으로 사회적 범주가 변한다. 논문은 장애 연구와 퀴어 이론의 접점을 이 영화를 분석하며 풀어가고 있다. 이 글에서 내가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관련 논의는 생략.

위 세 등장인물 중에서 나는 누구에게 가장 이입했을까? 게이지만 어쨌든 비이성애자니 비숍에게? 아님 이성애자인 것 같지만 식당에서 노동하는 코넬리에게? 설마 인종차별발언, 성차별발언, 장애차별발언을 일삼고, 아웃팅은 기본이며 식당에서 종업원을 괴롭히는 우달에게?

현재 알바를 하다보니, 손님으로 가게엘 가도 알바나 점원에게 이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점원을 괴롭히거나 과하게 행동하는 손님에겐 속으로 내가 더 화내기도 한다. 며칠 전엔 한 시간 동안 날 괴롭힌 손님이 있어 완전 분노하기도 했다. ‘물건’을 계산해 달라고 하고선, 계산하고 있는데 새로운 ‘물건’을 추가하는 건 그럴 수도 있고 이런 경우야 빈번하니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계산을 대여섯 번을 했다는 것(최초 계산 요청 후 ‘물건’을 추가하는 일을 하나의 단위로 했을 때, 대여섯 번;;). 아울러 포장하고 있는데 ‘물건’을 추가해서 바로 계산해달라고 하고, 다시 계산하고 포장하는데, 몇 가지 ‘물건’을 빼는 건 기본. 나중엔 ‘물건’을 포장하고 있는데,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빼달라고 독촉하더라는. ㅡ_ㅡ;; 뭐, 이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다른 손님도 있는데 다른 손님은 완전히 무시하고, 계산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빼달라고 독촉하는 건 무슨 경우람.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직접 빼는 과정에서 다른 ‘물건’을 떨어뜨린 일도 있었다. 근데 그는 그 ‘물건’들을 줍지 않았다. 이런 일은 당연히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는 태도로,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덧붙이면 그는 ‘물건’을 아무렇게 대했다. 막 던지는 식이었다. 이게 나의 분노를 폭발시킨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일을 한 시간 동안 겪었다. 더 무서운 건, 나는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며칠 뒤 가게를 다시 찾은 그는 나와 매우 친한 것처럼 행동하더라는. 일종의 공포였다. 점원의 입장에서 가장 꼴사나운 손님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점원에게도 과시하며 그 지위에 맞는 대우를 요구할 때다. 자기가 교수면 학교에서나 교수지 가게에서도 교순가? 글고 교수가 뭐 벼슬이고 지위냐? 암튼 … 흥분을 가라앉히고. 흠, 흠.

나는 등장인물 중에서 누구에게 이입했을까? 이미 예상했겠지만, 우달이다. -_-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종업원 괴롭히기는 기본이며 민폐는 필수 옵션인 인간이다. 그런데 그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단 하나다. 영화 초반에 그는 문을 잠그면서 잠궜다가 열기를 반복하며 “하나, 둘, 셋, 넷, 다섯”을 센다. 즉, 다섯 번에 걸친 행동으로 문을 잠근다. 불을 켤 때도 마찬가지다.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다섯 번째 켠다. 나, 이 장면에서 우달에게 이입했다. 우달이 금을 절대 밟지 않고 걷는 장면에선 너무 공감했다. 아하하. 인정하지 않지만 나, 강박증이다. 물론 우달과 같은 방식은 아니다. 금을 밟지 않고 걷는 것과 같은 식의 강박은 아니고 다른 식의 강박이 있다. 아무려나 그의 행동에 나의 어떤 행동이 곧장 떠올랐고, 그 이후론 그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호모포비아 발언까지도! 내가 나이들면 우달과 같을까 싶었다. 물론 이 영화, 본격 분석하면 비판할 거리가 너무 많다. 그런데 강박증인 주인공 때문에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달까. 아하하;;; 다른 사람에겐 어처구니 없고, 이상하기만 한 어떤 행동이 자신에겐 너무도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하루 일정이 꼬이고, 하루 종일 찝찝하고 불쾌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나의 이입은 때로, 누가 누구와 공감하는가를 알려주는 흥미로울 수 있는 사례기도 하다. 모든 트랜스/퀴어들이 서로에게 공감하는 건 아니다. 소설이건 영화건, 등장인물이 자신과 동일하다고 여기는 범주의 인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에게 공감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사고가 나기 전까진 돈 많고 잘 나가는 비숍에게 나는 무엇을 공감할 수 있겠는가. 그가 게이가 아니라 레즈비언 트랜스젠더여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어떤 정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느냐의 문제기도 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느낀, 혹은 내가 밀착해서 떨어질 수 없었던 정치는 강박증이었다. 적어도 내겐 강박증이 트랜스라는 범주, 비이성애자라는 범주 만큼의 중요한 정치적 이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박증은 다른 여타의 비규범적인 행동만큼이나 기이하고 이상한 행동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행동양식과 관련 있는 중요한 이슈기도 하다.

암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를 뒤늦게 보며, 도저히 내가 좋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인물에게 공감하고 그를 변호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뭔가 재밌었다. 현실에서 비숍과 같은 인물을 손님으로 만난다면? 강박증이건 뭐건 그는 최악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의 감정이 재밌었다. 하하.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일 뿐인가?

[이태원 살인사건] 2009.09.28.월. 18:10. 아트레온 5관 7층 E-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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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영화제인 SeLFF의 자막 작업으로 읽은 거 말고, 가장 최근 영화관에 간 건 … 무려 3월 15일. 허억. 바쁘다는 핑계로, 학회 일이 있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기도 했거니와 주말에 영화관을 가지 않으니 이런 사태가 발생했네요. 흑. ㅠ_ㅠ

이 영화는 어떻게든 극장에 가고 싶었습니다. 이태원을 배경으로 한다니까요. 물론 어느 기사에서 얼핏, 이태원UN 클럽에서 촬영한 것 외엔 모두 세트장에서 촬영했다는 정보는 이미 읽었어요. 영화의 실질적인 배경이 이태원은 아닌 거죠. 하지만 이 영화는 이태원이 주제어, 핵심어더군요. 암튼, 제목에 끌려 영화관에 갔습니다. 매우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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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는 소설의 반은 장르소설이다. 판타지건, 추리소설이건 뭐건.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은 꽤나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소재가 살인사건인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언제나 불쾌함을 떨칠 수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죽은 이는 언제나 대상으로만 남겨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떻게든 죽은 이를 삶을 영위한 생명으로 다루려고 애써도 어쩔 수가 없다. 살인으로 죽은 이는 언제나 피사체로 묘사될 뿐이다. 이것이 불편해서 불만이었다. 혹시 [옥스포드 살인방정식]을 읽은 분 계시는지? 이 소설은 올해 읽은 소설 중 최고에 속한다. 인간에게 애정을 품는 척하지만, 이 소설은 오직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만 관심이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부분은 이 지점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과 관련 있는 이가 아니면, 등장 인물 중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작가는 매우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른다. (혹시나 앞으로 읽을 분을 위해 여기까지만 쓰지만, 읽었다면 무슨 뜻인지 알 듯.)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죽은 이의 역사는 사건 해결이라는 측면에서만 중요하다. 그 외의 역사는 필요없다. 이 장면은 죽은 이의 애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상처의 무게는 무시된다. 헤집어서 어떻게든 증거를 잡으려고 애쓴다. 물론 한 마디 한다, “많이 힘드시겠지만 …”이라고. 이것 뿐이다. 죽은 이 역시 이 과정에서만 등장한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사건을 증거하는 피사체로 등장한다. 죽은 이의 몸은 주한미군의 폭력, 주한미군과 관련 있는 한미행정협정(SOFA)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한 증거로만 등장한다. 죽은 이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은 말이 없다. 법정의 방청석에서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직접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은 억울한 한국, 한미행정협정의 부당함으로 인해 피해만 당하는 한국의 상징이 된다.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은 애인은 조사해도 혈연가족은 조사하지 않는다. 이미 다 조사한 것처럼 다른 형사가 대신 설명할 뿐, 혈연가족을 조사하는 장면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애인만 조사한다. 당연하다. 혈연가족은 한국의 억울함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상당히 매력적인 정치학을 펼칠 수 있음에도 매우 평이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아니 평이한 게 아니라 상당히 문제가 많은 영화가 되었다.

02
이미 다 알고 있는 걸까? 이 영화의 주요 공간은 법정과 경찰 취조실이다. 영화 제목에 굳이 이태원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이 영화의 제목을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미국국적소지자 살인사건” 정도려나? 그럼에도 이태원을 제목에 사용한 건 이유가 있다.

감독은 이태원을 주한미군 지역, 미국국적소지자, ‘외국인’들의 공간, 혹은 “점령지”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안타깝다. 이태원을 주한미군의 점령지이자, 한국의 피식민 상태의 상징으로 파악하는 건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운동권문학에서 주로 사용한 방식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시가 끔찍할 수 있습니다. 미리 경고합니다.*

혹시 밤 두 시나 세 시경 異胎院에 가보았나

불야성이 어떤 곳인지
치외법권이 어떤 것인지
산발한 반 토막 꿈 어지럽게 흩어지고
이 지상 가장 점잖은 척 음흉한 나라
희고 검은 씨앗, 누워 받는 곳
異胎院, 식민지 일번지 혹시 가보았나
-고광헌 「異胎院」(1985) 중에서.

이태원의 공식 한자 표기는 梨泰院인데 고광헌이 異胎院이란 한자 표기를 사용한 건 이태원의 역사때문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정은 일본남성의 아이를 가진 비구니와 여성들을 조선남성의 아이를 가진 여성들과 구분하기 위해 따로 모여 살게 했는데, 그 지역이 현재 이태원이다. 異胎院은, 한자를 통해 알 수 있듯, ‘외국인의 아이를 밴 자궁’이란 뜻이다. 1980년대 중반 즈음부터 반미운동을 펼친 이들은 바로 이를 이용해서 한국이 미군의 점령지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異胎院이란 표기를 사용했다.

2009년의 극장가에 걸린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이태원을 이해하는 입장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이태원을 영화 제목으로 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태원을 영화 제목으로 걸었다는 건, 이태원을 한미관계의 상징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영화에서 이태원은 매우 단순한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저 미국국적의 사람들이 한국인을 살해했지만 한미행정협정으로 살인죄에 따른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의 상징일 뿐이다. 영화에서 이태원은 사람이 사는 동네가 아니다. 유흥가이자 한미행정협정의 보호를 받는 미국인의 특권을 상징할 뿐이다.

그래서다. 영화관에 있는 내내 괴로웠다. 영화가 끝나고 나선 더 괴로웠고.
(괴로워 하는 나 자신이 가증스럽기도 하고.)

03
영화는 매우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있지만 이 역시 매우 짧게 언급하고 끝난다. 다름 아니라 인종정치, 아니 혈연정치다.

영화에서 살인범으로 지목된 이는 두 명. 한 명은 한국인 아버지를 둔 미국국적의 알렉스다. 다른 한 명은 멕시코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미국국적의 피어스다. 피어스는 그나마 어머니의 국적이 언급되지만 알렉스는 어머니의 국적이 언급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감독의 인종정치에서, 더 정확하게는 혈연정치에서 아버지가 한국인이면 어머니의 국적과 인종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까? 알 수 없다. 영화를 읽는 내내 궁금했다. 도대체 알렉스의 어머니의 국적과 인종은 무엇일까? 하지만 오직 아버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알렉스의 아버지만 나온다. 결국 아버지들의 싸움이다. 멕시코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어스의 부재하는 아버지와 한국인 아버지의 피를 받은 알렉스의 끊임없이 등장하는 (힘 있는)아버지의 대립일 뿐이다. 이것은 죽인 이게서도 마찬가지다. 죽은 이를 설명하는 몇 안 되는 내용 중엔 3대 독자란 말도 있다. 이 말에 감독의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영화 초반에 피어스를 본 박대식 검사는 “미국인이 왜 저래?” 인가 “한국인이 왜 저래?”인가, 암튼 얼굴 모습으로 인종을 구분한다. 그때 검사 옆에 있던 이가 멕시코인 미군과 기지촌에서 일한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라고 설명한다. 외모로 인종과 국적을 구분하는 것도 매우 논쟁적인 이슈지만, 나의 관심은 조금 달랐다. 만약 피어스의 아버지가 백인미국남성이었다면, 난 좀 의심했을 것이다. 1980년 전후는 그런 시기였기 때문이다. 기지촌 ‘성노동자’가 백인미국남성과 결혼할 가능성은 매우 적은 시기였다. 1950년대부터 시작한 국제아(혹은 ‘혼혈아’로도 불리는) 이슈는 이태원과 기지촌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미국에 가서 살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한국에서 산다면 그 차별이 극심해서 이태원이나 기지촌을 떠날 수 없었다고 한다.

피어스는 미국국적에 미군이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걸까? 별로 그렇지도 않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상, 비록 한미행정협정으로 상당한 특권을 누린다고 해도, 국제아란 지위는 미국국적보다 중요하다. 미군은 피어스가 한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알렉스의 돈 많은 아버지와 변호사 집단은 알렉스가 한국혈통이란 이유로(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영화 내내 노골적이다) 피어스를 범인으로 몬다. 그럼 간단하니까. 하지만 영화는 이 이슈를 외면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형사 중 한 명이 미군의 인종차별 태도를 언급하긴 한다. 하지만 한국인이 국제아와 외국인을 차별하는 태도는 싹 무시한다. 박대식 검사가 피어스 편을 드는 것 같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박대식은 범인을 가리는 게 중요할 뿐이니까(이 태도만은 그나마 괜찮다). 그래서 마치 인종차별은 한국에 없다는 듯, 혹은 피어스는 미국국적이니 국제아라도 한국에선 차별을 받지 않을 거란 듯.

여기서 나는 괴로웠다. 피어스와 알렉스 둘 중 한 명, 혹은 둘 모두가 살인범이어도 미국국적 소지자고 그 중 한 명은 돈 많은 아버지를 둔 덕분에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런데 이 과정을 혈연과 아버지의 싸움으로 바꾸고, 한국인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하는 감독의 태도에도 화가 났다. 죽은 이의 가족은 슬픔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될 뿐이란 점음 너무 불편했다. 메시지를 위해 사건을 이용했다는 느낌 밖에 안 든다. 그래서 영화관에 있는 내내, 영화가 끝나서도 괴로웠다. 주한미군의 폭력 문제, 한미행정협정의 부당함을 알리는 방법이 정녕 이것 밖에 없었던 걸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성찰하고 더 복잡하게 고민할 수는 없었던 걸까? 이런 식의 인식론에 문제제기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그에게 무의미한 걸까? 정말 묻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은밀한 유혹Affinity

[은밀한 유혹Affinity]를 꼼꼼하게 살폈다. 세라 워터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Tim Fywell 감독이 만든 영화다. 폐막작이라 다행이었다. 일요일에 상영하는데 자막 작업이 토요일 낮에 끝났거든-_-;; 아쉬운 건, 미리 홍보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 단연 최고였는데!

영화를 15분 정도 남겨뒀을 때까지만 해도, 난 이 영화와 관련해서 쓰고 싶은 글은 다음과 같았다.

트랜스젠더 범주를 정의하는 문제는 상당히 많은 논쟁을 유발한다. 누구의 입장을 반영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범주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 학제의 맥락에서 트랜스젠더는 규범적이지 않는 젠더 표현을 실천하는 이들을 아우른다. 물론 여기서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트랜스섹슈얼, 퀴어, 레즈비언, 게이, 바이, 드랙, 크로스드레서, 간성,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호한 사람 등을 아우른다. 어떤 이들은 이 정의를 미국 백인에 제한한다. 다른 이들은 인도의 히즈라, 미국 원주민의 두 영혼의 사람들(버다치로 알려진), 동남아 지역의 카토이 등을 아우르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폭넓게 적용하는 몇몇 활동가들과 역사학자들은 잔다르크를 트랜스젠더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확장할 수 있을 때까지 확장하면, 한국의 무당도 트랜스젠더일 수 있다. 물론 이는 미국의 백인 중심, 학제 중심의 해석이다. 그나마 이런 정의가 그들의 학제에선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란 말은 상당히 골치 아프다. 일단 학제에선 합의 과정은커녕 아예 관심 밖이다. 그리고 이 용어를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합의가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그래서 더 즐겁기도 하다. 생생하니까. 각자의 입장을 좀 더 활발하게 드러낼 수 있으니까. 어떤 의미를 암기하는 식으로 배울 필요 없이 개개인의 경험 속에서 정의할 수 있으니까.

용어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비규범적인 방식으로 젠더를 표현하는 이들로 정의하고, 무당까지도 포함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영화 [은밀한 유혹]은 트랜스젠더 영화로 해석할 수 있다.


난 이 영화의 감상문을 이런 내용으로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15분을 마저 살폈을 때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트랜스젠더 실천’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표면적으로 레즈비언 관계를 다루는 이 영화를 트랜스젠더 영화로 독해할 수 있었던 건 어째서일까.

줄거리를 대충 쓰면, 일단 시대적 배경은 1870년대. 셀리나 도즈란 영매가 살인죄로 여자 감옥에 갇혀 있다. 이 감옥에 마가렛이 수감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을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도즈를 만난다. 둘은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고, 마가렛은 영매들의 세계를 배워간다.

[현재 이 영화는 개봉하지도 않았고 개봉 일정도 잡히지 않은 것 같으며, 책도 한글로 옮기지 않은 상태라 스포일러 남발합니다. 알아서 피하세요. :P]

내가 주목한 부분은 도즈의 영이 피터란 남성적인 존재란 점이다. 무당으로 치면, 주민등록번호 2번인 무당이 모시는 신이 주민등록번호 1번인 사람이랄까? 여성과 남성으로 개인을 분명하게 나누는 사회에서 도즈와 피터는 서로 다른 성별 번호를 부여 받은 사람이다(이런 설명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당시 서구에서 이런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건 아니다). 피터는 도즈의 몸을 매개하고, 이 과정에서 도즈는 피터를 체화해서 피터로 행동한다. 도즈가 피터를 불러들이지 않을 때와 피터를 불러 들여 도즈의 몸을 매개로 피터로서 말을 할 때, 도즈의 목소리부터 행동까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변하는데 이 과정이 묘하게 성별 전환과 닮았다. 비록 피터를 통한 젠더 전환/변화가 ‘영구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시적인 사건’이라 해도 나는 이것을 트랜스젠더스러운 실천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아울러 피터가 도즈의 영으로서 평생 함께 한다면, 이 또한 ‘영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도즈는 접신 경험을 통해 ‘남성다움’을 실천한다. 주변 사람들이 도즈가 영매란 사실을 알고 경외하는데, 이를 통해 도즈는 빅토리아시대의 여성다움을 실천하지 않는다. 이는 도즈의 젠더 실천을 상당히 흥미롭게 해석할 여지를 준다. 그렇다고 내가 이 영화를 레즈비언과 ftm/트랜스남성간의 경계분쟁을 논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미국 학제의 개념으로서 트랜스젠더 실천이 상당히 일상적으로 발생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다른 한편,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로 영을 소환했다는 혐의도 강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영에 씌어서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도즈는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자신이 살인한 것이 아니라 피터가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접신 상태에서 피터를 통제할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피터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이는 도즈의 젠더 실천이 규범적이지 않아도 무방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즉, 도즈는 자신을 영매로 소개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행동이 상당히 자유로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스포일러. 영화의 핵심이기도 함]

문제는 후반부 10분 정도를 남겨 놓고 등장하는 반전에 있다. 도즈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선 자신의 접신 경험을 공연한다. 이때 도즈 뒤에 피터가 등장하고 도즈의 입을 매개로 말을 한다. 근데 피터는 사실 도즈의 파트너, 바이거스였다. 바이거스가 피터로 분장해선, 영혼인 것처럼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 이렇게 되면 도즈가 영매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도즈가 진짜 영매인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도즈는 자신을 영매로 소개함으로써 사회에서 공인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동시에 행동 제약이 줄어드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이제 방점은 바이거스의 행동에 찍으면 된다.

바이거스는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인물이지만 실제 등장하는 분량은 상당히 적다. 배후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기에 사건을 조율하고 지배하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국에 머물 때의 드라큘라를 닮았기도 하다. 일종의 안개 같은 역할이다. 그래서 바이거스의 행동을 분석하는 건 쉽지 않다. 그저, 피터로 분장했을 때 바이거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적어도 영적 사기를 위한 단순한 도구 같지는 않다. 피터가 바이거스가 분장한 인물이란 게 밝혀지는 사건에서, 피터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지!”란 말을 한다. 바이거스는 항상 도즈 옆에서 살았기에 피터가 특별히 멀리서 온 건 아니다. 피터의 모습으로 분장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아주 멀리서 온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분장에 걸리는 시간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피터로서 바이거스와 하녀로서 바이거스, 도즈의 파트너로서 바이거스가 상당히 다른 자아들이란 걸 암시한다. 적어도 피터로 변해서 나타난 바이거스는 피터로 변장했거나 분장한 바이거스가 아니라 피터, 그 자체이다. 이런 점에서 피터/바이거스의 변환 관계 역시 의미심장하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도즈와 피터/바이거스가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어떤 행동을 트랜스젠더스러운 실천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런 게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영화 속 시대를 살고 있는 비규범적인 존재들이 생존을 위해 사용한 전략들이 중요하다. 그 전략들은 그 사회의 규범과 규범의 허점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암튼, 정말 흥미롭고 재밌는 영화다. 정식 개봉을 안 한다면 비공식 개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