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기: 채식, 건강, 그리고 해석

지난 번에도 소개했듯, 인권오름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새 글이 떴어요. 후.

인권오름 편집본: http://goo.gl/fSPH
발송용 웹페이지본: http://goo.gl/fFsp

사실 이 글이 “인권”오름에 적합한지 고민했지만, 그냥 보냈습니다.;;

초고는 9월 초에 작성했습니다. 병원에 갔다 온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에 적었으니까요. 지금은 재검을 받으러 갈 날을 가늠하고 있고요. 추석연휴와 편집자의 휴가로 미뤄지다보니 지금에야 공개되었달까요.

하지만 글의 주제는 아프다는 것 자체가 아니기에 상관없습니다. 그럼 주제가 뭘까요?

ㄱ. 경험이란 세계를 해석하는 핵심이자 투명하다? 지난 주말에 글을 이메일로 보내고 나서야 경험본질주의로 읽힐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글 말미에 부연설명을 할까 했습니다. 귀찮아서 관뒀지만요. 흐.

ㄴ. 채식을 바탕으로 얘기하며, 다른 경험은 다른 정치학을 형성하지만 지배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학은 정치학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표면적으론 그렇습니다.

ㄷ. 자기 주장이 분명한 듯해도, 루인은 갈등한다? 넵! 아무리 명징한 언어를 가진 듯하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어도 끊임없이 갈등한다는 게 글의 주제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크크. 😛

자시 세계가 분명한 듯해도 갈등하고, 자기 언어가 명징한 듯해도 여전히 불안한 감정이 제 주요 관심입니다. 쾌락 속에 불안이 머물고, 불안 속에 쾌락이 머무니까요.

[#M_여기서 원문 읽기|링크 가기|

인권오름 2010.09.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기: 채식, 건강, 그리고 해석

by 루인

 

아기가 결석 진단을 받았다. 이제 다섯 달 조금 더 지난 아이가 결석이라 의사도 당황했다. 매우 특이한 경우라며, 연신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며 다른 사료와 캔은 절대 주지 말고 처방사료만 주라고 했다. 다른 사료를 줬다간 결석으로 방광이 터져 죽을
수도 있다면서.

 

처방사료는 아무래도 육식일 듯하여, 환기시키는 겸 채식사료를 준다고 했다. 엄마고양이의 중성화 수술로 그 병원에 갔을 때 의사에게
말했고, 아기가 아파 병원에 갔을 때 나를 보자 곧바로 엄마고양이의 이름을 대며 안부를 물었기에, 기억하는 줄 알았다. 의사는
채식사료란 말에,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며 성묘는 괜찮아도 어린 아기일 경우, 채식사료로 결석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했다. 예전에도 채식사료를 먹는 아이가 결석으로 왔다면서. 정확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결석이 있는 모든
고양이가 채식을 하는 것은 아니며, 채식을 하는 모든 고양이에게 결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해도 괜찮은
걸까?

 

집사인 나는 90년대 초중반 즈음부터 채식을 하고 있다. 세상에 채식주의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던 시절, 지금은 밝히기 수줍은
이유로 채식을 시작했다. 그래서 여덟 아이를 임신 중인 동네고양이를 입양했을 때, 당연하단 듯 채식사료를 선택했다.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고양이는 육식동물이라 채식사료를 주면 안 된다는 글이나 말과 채식사료가 더 좋다는 말이나 글 사이에서 고민이
상당했다. 생전 처음 고양이와 사는데, 흔하지 않은 선택을 한다는 점도 걱정을 부추겼다. 그럼에도 채식사료를 선택하고 고집하는
건, 분명 나의 이기심이다.

 

그럼 고양이의 ‘선택’은? 인연인지 우연인지, 엄마고양이를 임시 보호했던 집 역시 채식을 한다. 엄마고양이는 그 집을 직접
선택했고, 채식사료를 아그작와그작 먹으며 머물렀다. 내게 온 이후, 엄마고양이는 내게서 벗어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가지 않고 내 곁에 머물렀다. “야옹”과 “냐아아옹”이라는 언어로만 소통하는 관계에서, 나는 그런 행동을 내가 제공하는
환경에서 살겠다는 고양이의 선택으로 해석했다. 해석이란 언제나 자의적이지만, 자의적이기에 함께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사람들은 내게, 채식을 하고 나서 몸과 건강이 많이 좋아졌냐고 묻곤 한다. 이런 질문은, 솔직히 곤혹스럽다.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적어도 2000년대 들어, 병원에 한 번도 안 갔으니 건강한 걸까? 알러지성 비염과 신경성 편두통을 빼면 특별히 아픈 곳이
없으니 건강한 걸까? 잘 모르겠다.

 

단지 잘 몰라서 곤혹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채식과 건강의 상관관계 혹은 음식과 건강의 상관관계가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난 이 둘이
밀접하게 관련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채식을 하면 몸이 좋아진다는 말을, 안 좋아진다는 말 만큼이나 믿지 않는다. 한국에서
웰빙 열풍이 불기 전까지만 해도, 채식은 건강을 해치는 방법이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환경에선 그런 인식이 만연했다. 웰빙
열풍이 불자 채식은 건강하게 사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나의 행동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행동을 해석하는 틀만 바뀌었다. 나의
채식은 건강에 안 좋은 식습관에서 건강을 위한 식습관으로 변했다. 그래서 난 채식이 몸에 더 좋다는 말도, 그렇지 않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해석하는 틀과 지배적인 흐름이 변한다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그럼 나와 사는 고양이들은? 적어도 엄마고양이는 매우 건강하다. 길에서 일 년 정도 살았지만, 피검사를 했을 때 깨끗했고, 나와
살기 시작하며 모질이 확실히 좋아졌다. 이것이 채식사료의 효과인지 집이라는 영역에서 밥과 물 걱정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채식사료를 먹는 다른 집 고양이들 역시, 어디 아픈 곳 없이 건강하다고
한다. 채식을 해서 건강한 건지, 집에서 살아서 건강한 건지 알 수 없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기고양이가 아프다. 결석이 생겼고 약과 처방사료를 먹어야 하고, 한 달 뒤 재검을 받아야 한다. 의사는 결석의 주요
원인으로 채식사료를 꼽았다. 고양이건 개건 육식동물로 분류되는 동반종이 채식을 하는 경우가 흔한 건 아니기에 채식은 분명 두드러진
변수다. 그래서 채식은 의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요인 중 하나다. 난 의사의 추정을 신뢰하지 않는다. 처방사료만
먹여야 한다는 처방을 불신하는 건 아니다. 의료화와 의료권력을 비판하지만, 내 목숨이 아니라서 의사의 처방을 쉽게 무시할 수도
없다. 내가 불신하는 건 처방이 아니라 채식과 결석, 채식과 건강의 관계에 대한 의사의 진단과 해석이다. 의사는 육식을 밑절미
삼아 세상을 해석하고 나는 채식을 밑절미 삼아 세상을 해석한다. 나와 의사의 다른 입장, 음식에 바탕을 둔 다른 경험은 몸과
몸으로 살아가는 세계를 달리 해석하도록 한다. 그래서 채식이건 육식이건 음식을 먹는 행위는 세계를 해석하는 행위, 즉,
세계관이다. 육식을 당연하게 여기고 고양이는 당연히 육식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라서, 채식을 세계관으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고민한다. 내 목숨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생명의 목숨을 걸고 선택한 결정이라, 갈등도 심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_M#]

+
알바 하는 곳에서 제가 앉는 곳 주변 사람이 모두 감기에 걸렸는데.. 그래서인지 알 수 없지만, 요즘 감기에 걸렸습니다. ;ㅅ;
이 시기에 감기에 걸린 일이 거의 없어 당황했다는.. 쿨럭.

채식 단상: 생명과 윤리 이슈 – 질문만 던지기

얼마 전,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자세히는 언급하지 않으리라. 동거묘가 있는 입장에선, 행여라도 냥이가 외출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동거묘가 잠깐 외출한 사이에 사건이 발생하는 일은 빈번하니 이번 일이 특별한 건 아니다. 이번 일로 유난스레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와 같은 사건이 특별할 게 없음을 새삼스레 깨달았을 뿐이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다른 많은 사건처럼 그 사건도 여성혐오를 동반했다. 많은 이들이 가해자로 가정하는 이를 비난했다. 이런 비난의 언설이 불편하여, 그 사건을 외면했다. 아울러 그렇게 비난하는 이들의 불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비난하는 행위를 통해 얻고자/보상받고자 하는 것이 무엇(윤리? 권력? 규범적 지위? 욕설 자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일각에선 채식-육식 논쟁이 벌어졌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동물학대와 육식행위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논쟁은 어김없이 그럼 식물을 먹는 행위는 정당하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동물학대와 육식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언설에, 그럼 식물은 생명이 아니냐는 반론은 잊히지 않고 등장한다. 이 반론은 채식이 정치적 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한 그때부터, 음식을 먹는 행위가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을 때까지 반복하리라(즉,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듯).
 
비록 이런 반론의 일부는 혐오발화에 가깝지만, 나 역시 가끔은 묻고 싶다. 동물학대와 육식행위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둘을 동일시해도 괜찮은걸까? 둘은 정말 대응관계에 있는 걸까? 채식하는 사람도 동물을 학대한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동물학대와 육식행위를 동일시할 때 놓치는 부분, 동물학대와 육식행위를 동일시하며 그 대안으로 채식을 얘기할 때 놓치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왜 채식이 대안이어야 할까? 난 잘 모르겠다.)
 
채식을 하는 이들 중 일부는 채식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얘기하며 채식행위와 육식행위에 윤리적인 위계(이른바 생명윤리)를 부여한다. 채식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것. (최근에 와선 이런 주장을 자중하는 분위기지만..) 하지만 이런 윤리는 늘 동물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생명과 식물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생명을 구분하고, 둘 사이에 우열관계를 만든다. 이 우열관계에서 죽어도 괜찮은 생명과 죽으면 안 되는 생명이 정해진다. 하지만 누가 이 둘의 위계관계를 정할 수 있는 걸까? 누구의 편의일까? 나를 비롯한 모든 판단은 결국 인간이 기준이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이라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인간중심이 아닌 것이 어디있으랴. 그저 채식에 윤리적 우위를 부여하는 이들에게 육식이 문제인 것처럼, 동물-식물의 생명위계를 가정하는 언설 역시 논쟁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위계를 설정하겠다면, 생명윤리에서 식물의 생명을 하위에 둘 수 있는 근거를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설득력이란 게 매우 논쟁적인 영역이라, 실현할 수 없는 영역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요청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남은 질문에 나는 언젠가 어떤 모색을 하고 싶다.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동물학대-육식행위-채식행위의 관계를 좀 다른 방식으로 고민 해야한다는 고민만 있을 뿐. 뭐, 누군가 울림을 주는 그런 글을 쓰거나 이미 관련 글이 있어 추천해준다면 너무 고맙고!

+
이 글은 콩단백이란 글과 같은 날 썼다. 그런데 이제야 공개하는 건, 내용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까먹고 있었다… ;;;;;;;;;;;;;;;;;;;;;

콩단백 혹은 콩고기로 불리는 어떤 식품에 관한 단상.

콩단백 혹은 콩고기는 육류 혹은 고기를 모방한 음식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아울러 어떤 이들은 콩단백/콩고기를 먹는 채식(주의)자를 불쌍히 여기기도 한다. 그렇게 먹을 바에야 그냥 고기를 먹지 왜 채식을 하냐며. 나 역시 얼마전까지 이렇게 이해했다. 콩고기를 처음 먹었을 땐 그 질감에 뜨악하며 다시는 못 먹을 음식으로 분류했고. 요즘은? 그냥 먹는다.

콩단백/콩고기를 이해하는 방식이 변했기때문이다. 육식 혹은 육류를 기준으로 하면 콩단백/콩고기는 육류를 모방한 제품이다. 어떻게든 고기와 비슷한 질감, 고기와 비슷한 모양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제품이다. 그리하여 고기를 먹고 싶지만 먹지 못 하는 이들의 대체제다. 하지만 콩단백/콩고기는 그냥 콩으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음식 중 하나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두부를 상상하면 편하다. 겉모습만 봤을 때 콩과 두부는 닮지 않았다. 두부의 출처가 콩이라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콩단백/콩고기 역시 마찬가지. 그냥 콩과 여타의 채식 재료를 섞어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식 중 하나일 뿐이다.
 
기준을 바꾸면 간단한 일이다. 콩단백/콩고기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그 기준이 여전히 육식과 육류/고기라면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