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슬픔의 네트워크: 라즈 온 에어Raz on Air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인천인권영화제의 상영작 <라즈 온 에어>를 설명하는 원고를 썼습니다. 좀 급하게 써서 부끄럽지만…
해설서가 나오면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하는데, 상영기간에 보내 줄 여력이 없을 테니 나중에 오겠지요.. 책을 받으면 영화제 홍보와 함께 올리려고 했는데.. 이건 안 될 듯하여 소개글 먼저 올립니다. writing 메뉴엔 나중에 책자를 받으면 그때 추가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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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제18회 인천인권영화제, <라즈 온 에어> 인권해설 원고.
외로움과 슬픔의 네트워크
-루인(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runtoruin@gmail.com )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라즈의 팬은 말했다. 라즈는 당신도 당당하게 살라고 맞받아쳤다. 일상에서 비슷한 일화는 수두룩하다. 나는 특강을 간 자리에서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어쨌거나 행복하기에 행복하다고 답할 때가 있다. 청중은 감동하고 때때로 박수를 친다. 젠장.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 행복하냐는 질문 모두 칭찬이 아니다.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존재/범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범주의 범위/한계를 확인하는 언설이자 트랜스젠더는 당당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는 지배 규범을 환기하는 언설이다. 트랜스젠더의 고통과 불행은 이 사회가 트랜스젠더에게 요구하는 규범적 삶의 양식이자 미디어와 ‘대중’에게 통용되는 유일한 상상력이다. 트랜스젠더가 다양한 어려움과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과 불행이 트랜스젠더의 유일한 경험으로 강요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 행복하냐는 질문은 모두 존재의 사회적 가치를 평가하는 언설이며, 감정의 조건과 삶의 조건을 심문하는 언설이다.
이옥섭 감독의 다큐멘터리 <라즈 온 에어>(2012)는 볼 때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엔 정말 멋진 존재를 알아 기뻤다. 두 번째 봤을 땐 어떤 슬픔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살며 겪는 어떤 슬픔이나 외로움과의 공명이기도 하다. 몇 번 반복해서 보며 이 작품에 흐르는 정서가 경쾌함과 슬픔, 외로움의 동시적 공존이라고 느꼈다. 즉 <라즈 온 에어>는 트랜스젠더 라즈의 감정과 정동을 다룬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가 연예인이나 성판매 업소가 아닌 직업군에서도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특강 후기를 받은 적 있다. 라즈와 라즈의 부모님 역시 이런 상상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네가 갈 데는 그런 데[트랜스젠더 업소] 밖에 없다”는 부모의 말은 이 사회가 공유하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업소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의 직업 선택이다. 하지만 업소 선택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트랜스젠더에게 다른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가는 현재의 삶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 위치하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징표다. 트랜스젠더가 갈 곳이 제한된 것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를 제한된 곳에 가두려는 것이 이 사회의 규범이자 상상력이다. 다른 말로 이 사회는 트랜스젠더를 사유하기보다 소비하기만을 원한다. 사유해야 할 수많은 트랜스젠더 이슈가 소비된다. 이런 한계가 우리/트랜스젠더의 삶을 외롭고 또 슬프게 만든다. 이토록 빈약하고 빈곤한 상상력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 다른 말로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이 사회가 문제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나는 라즈가 아프리카 TV건 다른 방송이건 방송 진행자로 성공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트랜스젠더가 우리 자신의 삶을 상상할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타인이 우리/트랜스젠더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경고다.

트랜스젠더 인식론을 향하여: 메모

알다시피 그리고 이미 알고 있듯, 기존의 설명 체계와 사유 체계는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얘기한다면 후반부에 덧붙이는 식의 첨언이거나 트랜스젠더는 좀 다르게 경험한다는 식으로 부연할 뿐이다. 이것은 모두 기존의 지식 체계, 설명 방식 자체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트랜스젠더를 예외지만 추가로 알아야 할 항목 정도로 여김과 같다. 트랜스젠더 인식론은 기조의 지식 체계, 설명 체계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개개인 수준에선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트랜스젠더를 인식틀로,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기본이어야 한다. 비트랜스젠더 중심의 설명 방식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트랜스젠더를 중심축으로 삼는 걸 문제 삼는다면 이런 문제제기 자체를 다시 문제 삼아야 한다.
다른 한편, 트랜스젠더 인식론은 트랜스젠더의 경험, 트랜스젠더에 대한 경험을 쓰는 작업에도 중요하다. 나는 트랜스젠더의 경험과 관련한 문헌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때 중요한 건 트랜스젠더 경험 관련 글을 어떤 관점에서 설명하느냐가 쟁점이다. “트랜스젠더, 저 변태”라고 설명할 것이냐, “저 힘들고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것이냐, “이원 젠더 구조에서 삶이 어떻게 조직되느냐” “비트랜스젠더의 삶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기반으로 어떻게 구성되느냐”로 설명할 것이냐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가장 마지막 두 가지 방식이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위해 트랜스젠더는 인식론의 토대여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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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트랜스젠더 인식론과 관련한 글에 모 님께서 문의 메일을 주셨고 답장을 썼는데, 그 답장을 각색한 글입니다.

선천/생득과 선택/양육에 관하여, 두 번째

발아점: 모두에게 완자가 “148화 왼손잡이에 대한 고찰”
하지만 이 이슈는 예전에도 쓴 적이 있어서 딱히 이 글을 발아점이라고 하기엔…;;; 그리고 이것이 완자와 모완을 비난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트랜스젠더가, 바이/양성애자가, 동성애자가 그리고 또 다른 다양한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를 실천하고 삶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종종 받는 질문은 제목과 같다. “넌 타고난 거냐 선택한 거냐..” 이 무례한 질문을 받으면, 사실 선택인지 선천인지 고민에 빠지기 쉽다. 이런 식의 질문이 양자택일을 선택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질문에 워낙 많이 노출되다보니 질문 받은 내가 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많이 드는 기분은 뭔가 막막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 아닐까? 왜냐면 늘 얘기하듯, 우리는 타고나기도 했고 선택하기도 했으며 타고난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 선천과 선택의 양자택일 자체가 누가 누구에게 하는 질문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믿는다. 누가 누구에게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를 증명하도록 요구하는가? 선택과 선천이라는 양자택일은 적어도 내가 아는 수준/한계에서 퀴어의 경험은 아니다. 선천-선택이란 선택지 자체가 퀴어의 경험이 아니며 양자택일 형식이 퀴어의 경험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의 핵심 문제는 이성애-이원 젠더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데 있다. 이성애-이원젠더를 질문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 타고난 것, 그리하여 당연한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하여 이성애-이원젠더는 기준이며 기준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안전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런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왜 선천과 선택 사이에서 고르도록 요구하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왜 선천이냐 선택이냐가 궁금한지를 되물어야 한다. 또한, 내가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 알면 뭐하려고 묻는 건지를 따져야 한다. 그거 알면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내가 트랜스젠더 범주로 타고났다는 걸 알면 나에 대해 뭔가를 더 잘 알게 된 것인가? 내가 트랜스젠더 범주를 선택했다는 걸 알면 나에 대해 뭔가를 더 많이 알게 된 것인가? 이런 걸 알면 도대체 얼마나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인가? 무언가를 이해했다면 도대체 무얼 이해한 건가? 이 질문은 나의 삶을 묻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자의 불안과 위기감을 잠재우고 안정화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러니 내가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 알려고 하지 말고, 도대체 나로 인해 당신의 무엇이 불안한지를 살피면 좋겠다.
*여기서 선천-선택을 양자택일로 여기며 고르는 것이 곧 퀴어가 아니란 뜻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퀴어정치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함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