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애의 병리화를 통해 역사를 다시 추정하기

존재의 역사, 논의의 역사는 어떤 식으로 추정할 수 있을까? 새로운 퀴어 논의를 생산하는 이들에게 이 질문은 언제나 매우 어려운 문제다. 예를 들어 퀴어 이론의 역사는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퀴어 이론의 역사를 쓰는 작업은 그 작업을 진행하는 이들의 정치적 입장, 사회적 위치, 이론적 배경 등을 말해준다. 어떤 이들은 게일 루빈의 1984년 논문 “성을 사유하기”를 그 출발점으로 삼으며, 또 어떤 이들은 1980년대 에이즈 활동을 언급한다. 혹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논의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도 있고 프로이트나 데리다, 라깡을 불러오기도 한다. 혹은 미국에 거주하는 라티나 페미니스트의 1970-80년대 이론적 성취를 그 출발점으로 삼기도 한다. 이 모든 기원은 퀴어 이론의 역사가 그 자체로 해석과 해석이 경합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의미하며, 이러한 경합이 역사적 기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퀴어 이론의 역사는 이미 다양한 해석 경합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에 있다.
그럼 무성애 이론의 역사, 존재의 역사는 어떤 식으로 추정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무성애와 관련한 많은 논의를 충분히 읽지 못했고 그래서 이와 관련한 공부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한국에는 이미 무성애를 전공 삼아 연구를 하는 연구자가 있으니 나의 이 글은 부끄러운 메모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이디어와 상상력의 공유라는 측면일 것이다.
무성애의 역사를 다루는 논의는 대체로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병리화의 역사고 다른 하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역사다. 병리화의 역사를 요약하면, 1980년 DSM-III판에 억제된 성욕(Inhibited Sexual Desire)이라는 진단명으로 등재되었고, 1984년에는 성욕감퇴장애(Hypoactive Sexual Desire)으로 재명명 되었다. 그러다 2013년 무성애 정치를 수용하며 DSM은 성욕감퇴장애는 여성 성흥분장애(Female Sexual Interest/Arousal Disorder)와 남성 성흥분장애(Male Hypoactive Sexual Desire Disorder)로 구분되었고 무성애자로 정체화한 경우는 제외시키도록 했다(조윤희 2022, 128-129). DSM은 익히 잘 알려져 있듯, 동성애를 병리화했었고, DSM-III판은 트랜스젠더퀴어를 정신병리화했던 바로 그 진단 규범이기도 하다. 또 다른 역사는 커뮤니티의 역사인데, 이 역사는 대체로 1990년대 소규모 커뮤니티가 있었지만 2001년 AVEN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발해졌다고 논의된다. 이것이 무성애 역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다(무성애와 관련한 상당수의 문헌에서 대체로 이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나는 정확하게 이런 방식의 역사 쓰기가 무성애의 역사를 쓰는 작업을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하려 한다.
무성애자 존재의 역사, 운동의 역사를 추정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AVEN과 관련이 있다. 한편으로 AVEN은 무성애 운동사, 이론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무성애 온라인 커뮤니티이며, 무성애를 개념화하고 범주화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토론의 장을 형성하며 무성애를 논의 가능한 장으로 위치지었다. 또한 초반의 무성애 연구는 상당수가 AVEN의 내용, AVEN의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은 AVEN의 역할이 갖는 무게이자 의미이며, 성과이자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의는 무성애 운동과 연구가 진행되는 한 계속해서 언급되고 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AVEN의 잘못이 아니라, AVEN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식은 AVEN을 무성애자 존재, 무성애 운동, 무성애 연구의 시작처럼 인식하도록 하는 착오를 정당화한다. 예를 들어, 무성애 운동을 말할 때 AVEN부터 언급하는 것은 대체로 큰 무리가 없는 방식이다. AVEN 이전에 존재했던 활동이나 논의가 아직 충분히 정립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AVEN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작업은 대체로 무난한 일이며, 이것이 상당히 불편할 때에도 딱히 뭐라고 문제삼기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AVEN 이전을 상상하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하나의 단체가 예상보다 더 크게 성공하고 유명세를 떨칠 때, 또한 운동 내에서 영향력이 강력해질 때, 어떻게 다른 가능성을 사유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지의 예시가 될 수 있을 정도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AVEN의 잘못이 아니니 AVEN을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AVEN을 언급하는 이들이 더 많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 AVEN 이전의 역사는 어떻게 탐색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한 번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DSM-III판에 무성적 실천(혹은 억제된 성욕)이 등재된 그 사건에 주목하고 싶다. 어떤 증상이나 현상, 태도, 상황이 DSM에 등재된다는 말은 많은 것을 상상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1950년대 나온 DSM-I판에 동성애가 등재되었고, 1980년 DSM-III판에 트랜스젠더퀴어가 등재되었다. 익히 알려져 있듯, 호모섹슈얼리티라는 용어는 1860년대 처음 주조되었을 정도로 긴 역사를 갖는다. 트랜스젠더퀴어 역시 최소한 1900년대 초반에 동성애와는 구분되는 명명을 가진다. 이들 범주가 DSM에 등재될 때까지, 존재와 관련한 논의는 상당히 많았고, 특히 이들을 범죄화할 것이냐 신의 저주이자 천벌로 취급할 것이냐 병리화할 것이냐는 논쟁은 나름 빈번했다. 그러다 사회적 의료화 과정에서 이들 범주는 모두 의료 진단 범주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 역사를 상기하면서, DSM-III판에 무성애와 관련한 범주가 추가되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성적 욕망을 느끼지 않거나 약하게 느끼거나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을 문제가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를 논하는 장이 꽤나 오래 펼쳐졌다는 뜻이다. 혹은 성적 욕망이 있음을 인간의 본능적 욕망으로 삼고자 하는 사회적 기획이 작동했고, 이 기획에서 무성적 존재를 문제삼으며 치료하고 교정하고자 하는 노력이 상당히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논의가 축적되면서 1980년 DSM에 처음 등재되고, 1984년 다시 명칭이 수정되는 일련의 과정이 발생한다. 만약 무성적 삶을 문제 삼거나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회적이고 의료적인 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왜 DSM에 추가되었겠는가. 혹은 무성적 실천이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행태라면 왜 DSM-I판에서부터 등재되지 않고 나중에 추가되었겠는가. 이와 관련한 한 근거라면 한국의 1970년대 후반 정신병리화와 관련한 논의에서 무성애로 해석할 ‘억제된 성욕’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흔적은 무성애자 정체화의 역사로 논의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무성적 실천을 문제 삼고자 하는 사회적 태도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이런 관점으로 역사를 다시 읽으면 1980-1990년대 퀴어 이론이나 섹슈얼리티 이론과 관련해서 다시 독해할 수 있는 문헌이 상당히 많다. 로쓰블럼의 『보스턴 결혼』, 혹은 로쓰블럼이 2000년에 출간한 논문, 혹은 1994년에 나온 트랜스젠더퀴어의 의료적 조치 이후 성적 지향이 변하는 경험 등을 다룬 논문 등은 모두 무성애 실천을 언급한다(이것 말고도 여럿 있다). 이들 문헌은 무성애 실천을 본격적으로 논하지는 않지만, 무성애적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록해둔다. 예를 들어 아론 데버가 1994년 트랜스젠더퀴어의 성적지향과 관련해서 다룬 논문은, 의료적 조치를 경험하며 누구에게도 끌림을 느끼지 않는다고 답변한 사람을 기록해둔다. 이 답변을 한 사람은 무성애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별도의 항목으로 기록하겠다는 연구자의 태도는, 당시 학제에서 무성애를 본격적으로 논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커뮤니티에서 혹은 친구 사이에서 이와 관련한 논의가 있었음을 짐작하도록 한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은, 나의 글이 가정과 가설과 상상력에 근거한 추론이라는 점을 쉽게 파악할 것이다. 하지만 가설과 가정, 상상력에 근거한 추론은 모든 새로운 논의와 존재의 근거를 마련하는 역사적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대표적으로 트랜스젠더퀴어의 역사를 다루는 작업이 그러하다. 당연히 동성애가 가장 먼저일 것이라고 믿으면 트랜스젠더퀴어의 역사는 언제나 가장 최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정과 가설에 근거한 추론으로 접근하면 새롭게 해석할 단서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나는 이런 추론과 상상력의 힘을 믿는다. 지금 이 말이, 무성애는 상상력의 추론에만 존재하는 범주라는 말이 아니라, 훨씬 많은 곳에 흔적이 남아 있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그 흔적이 충분히 독해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를 다시 질문할 필요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병리화의 역사를 다시 해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병리화, 진단 범주로의 등재는 그 시기가 존재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작업을 위해 훨씬 오래된 논쟁의 역사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자 지표가 된다. 그렇다면 병리화와 관련한 논쟁은 부정적 기표, 낙인의 근거일 수도 있지만 존재의 흔적을 기록하기 위한 초기 언어의 등장으로 독해할 수도 있다.
+ 이 글에는 2023년 1학기 수업 시간에 무성애를 다루며 진행한 토론의 영향이 일부 남아 있다. 이 글에 쓴 내용 자체는 나의 아이디어겠지만, 수업에 함께 하며 무성애와 관련한 아이디어와 고민과 질문을 공유해준 모든 이들에게 고마움을!  (50H50 칼럼🍯)

취향은 어떻게 차별과 폭력을 낭만화하는가: 《인어공주》(2023)에 대한 반응에 반응하기

아마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세대에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감동적이고 또 재미있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경험이기도 한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TV에서 이 영화를 가족과 함께 본 기억이 있다. 이 영화를 방영하던 날 동네 사람들 모두 시간을 수차례 확인하며 설레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어머니는 감동을 받았고 이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몇 년이 지나서도 되풀이 했다.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년)를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는 주인공을 맡은 배우 비비안 리의 후광과 함께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소중한 추억, 즐거움, 재미, 감동이라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소설은 영문학사의 맥락에서도 매우 중요한 텍스트로 평가되고 있으며 당시 풀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면 반드시 상위권에 꼽히곤 했다.
이 소설이 처음 출판된 지 대략 90년 정도가 지난 최근, 출판사 팬맥밀란은 책 표지에 경고 문구를 추가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우리 역사의 충격적인 시대, 노예제를 낭만화하는 등 문제적 요소를 포함하는 소설”이라는 문장이 그것이다(출처). 이 소설은 미국 남북 전쟁 시대에 흑인 노예제를 자연 질서, 신의 섭리로 인식하던 시절의 감수성을 일정 정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인종주의가 생산한 유모(mammy?)와 고용주 혹은 구매자 사이의 관계를 따뜻한 애정과 보살핌으로 포장하고 있다. 물론 개별 관계에서 유모와 백인 구매자의 가족 사이에 애정과 친밀감이 존재하는 관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에게 따뜻하고 애정어린 보살핌의 기억일까? 누구에게 아름다운 옛시절일까?
비슷한 예시는 차고 넘친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릴 때,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매우 좋아해서, 과정을 보태지 않고도 최소한 100번은 읽었다. 빨간 표지의 하드커버, 그 유명한 계몽사의 세계문학전집 판본으로 읽었는데, 당시 유난히 좋아한 소설 중에서도 『로빈슨 크루소』는 단연 최고였다. 그렇기에 중학생이던 시절, 나는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의 완역판을 발견하고는 너무도 기뻐,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긁어모아 구입했다. 예상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 책을 다 못 읽었다. 아마 그때 이후로 나는 그 책을 지금까지도 다시 못 읽고 있다. 문학사의 맥락에서 디포의 이 소설은 근대 문학 혹은 소설 문학의 성립, 근대적 개인의 구성, 개별적 주체의 생산 등 나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 긍정적인 면이 일정 부분 존재하는 소설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완역판은 근대적 개인의 모험과 탐험 그리고 역경을 이기는 주체의 모습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았다. 어린이용으로 각색한 서사에 존재한 모험과 탐험의 내용은 그대로이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미개인’과 ‘야만인’에 대한 혐오와 멸시, 차별로 가득했다. 디포가 소설을 쓰던 시절은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이며 흑인은 기독교적 신앙이 없고 식인을 하는 야만인, 미개인이니 죽여 마땅한 존재이자, 그들을 죽이는 것이 신의 섭리로 정당화되던 시대였다. 디포의 소설은 정확하게 그러한 인식을 근거로 구성되었고, 로빈슨은 인종차별주의자, 살인자, 학살자였다. 다른 말로 어린이용 책에는 빠진 크루소의 모험과 탐험은 침략과 약탈, 그리고 인종차별의 여정이었다.
어린 시절의 익숙하고 행복한 공상을 가능하게 했던 서사에는 이런 차별과 폭력이 가득하다. 콩쥐팥쥐는 재혼한 여성에 대한 혐오를 확대재생산하며, 혈연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공동체라는 규범을 자연화한다. 신데델라나 백설공주 같은 이야기는 이성애-가부장제 서사를 유일하게 가치 있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로 치환하며, 여성이 경험하는 억압은 오직 괜찮은 남성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규범을 재생산한다. 그래서 제2 물결 페미니즘 운동과 이론화 작업이 활발해 졌을 때, 많은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가는 동화나 고전에 내재한 인종차별, 성차별, 백인중심주의, 화이트워싱의 낭만화, 퀴어와 장애인의 악마화 및 범죄화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비판은 이론적 작업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존의 동화를 다시 쓰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동화를 만드는 방향으로도 전개되었다. 요즘 들어 자주 만날 수 있는 성평등 감수성을 가진 동화, 다양성을 긍정하는 감수성을 담은 동화는 모두 그 시절 페미니스트의 치열한 노력의 성과다.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 시절 퀴어/페미니스트의 다시 쓰기, 다시 읽기 작업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고전은 고전으로 인정해라’, ‘동화를 왜 문제 삼느냐’, ‘어린이를 도구화한다’, ‘교조적이다’, ‘어린이에게 페미니즘과 퀴어를 주입하는 폭력이다’와 같은 말은 이미 그 시절에도 팽배했던 비난의 언어다. 하지만 퀴어/페미니스트의 노력은 지금의 새로운 서사를 가능하게 했다. 지금의 새로운 감수성은 최근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따른 변화의 영향도 있지만, 제2 물결 페미니즘이 등장한 후 50년에 걸친 노력이 만든 효과이기도 하다.
자,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변주해보자. 취향이나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은 정치에 선행해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영화 《인어공주》(2023)를 둘러싼 반응을 살피며 촉발되었다.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흑인이라서 안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원하는 주인공 이미지가 아니라서 안 보는 게 맞는 거다.”(이 글에 달린 댓글). 이 문장은 인종 차별을 정치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 소중한 추억의 문제로 치환한다. 취향이나 추억이 정치와 무관한 영역이라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인종주의와 관련한 경고가 붙을 이유가 없다. ‘나’의 비비안 리가 인종차별주의자일리가 없고, 라푼젤이 용맹할 이유가 없으며, 신데렐라가 스스로의 성취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올 수 없다. 흑인은 영원히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유모로 남아야 하고, 라푼젤은 왕자가 구조해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어공주 에리얼은 백인이며 붉은색 머리 색깔을 가진 존재여야만 한다는 상상력 혹은 추억 보정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흑인이어서 싫은 것이 아니라 어릴 때 봤던 에리얼의 이미지에 부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추억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그 추억은 반드시 아름답고 유지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할 이야기로 예시를 경유해보자. 1932년 용산에서 태어난 후루사토씨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즐겁게 놀며 행복한 시절을 보냈지만, 1945년 8월 부모님과 함께 세간을 남겨둔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후루사토씨는 자신의 생애가 역사의 격량에 휩쓸린 피해자라고 느끼며 용산에서 살던 시절이 그립다. 이것은 조선일보가 2023년 5월에 칼럼 형식으로 게재한 글의 일부다. 식민지 침략국가 국민의 기억 속 한국은 행복하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피식민 상태로 살았던 그 시절의 한국인 혹은 조선인도 그렇게 느꼈을까? 물론 개개인은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으며, 개인이 국가의 모든 잘못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리는 왜 독일이 지금도 나치 전범과 대학살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일이 유난히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집단으로 추방한다. 국가의 잘못에 국가 구성원인 국민 혹은 개인의 책임을 면제하는 태도는 결국 누구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사태를 만든다. 예를 들어 제주 4.3 사건은 이승만 때 발생한 사건일 뿐 현재 정부가 왜 사과해야 하며, 전두환의 학살은 왜 현 정치권이 정치적 책임을 논하는가? 이것은 모두 지나간 과거에 대한 과도한 정치 공방인가? 역사적 차별과 폭력은 단순히 추상적 국가나 당시의 국가 대표가 져야 할 책임이 아니라 반복해서 고민하고 감당해야 할 책임이며, 그런 국가 체제를 지지하거나 승인하거나 방기했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그러니 후루사토씨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식민지 침략 시절을 아름다운 옛시절, 추억의 아름다운 공간으로 기억하는 행위는 모든 국가 폭력, 침략, 폭거, 약탈을 논의할 수 없게 만든다. 로빈슨 크루소의 학살과 약탈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되고, 스칼렛 오하라와 마미의 관계는 그저 아름답고 소중한 관계가 될 뿐이다. 이것이 추억과 취향의 정치학이다.
인어공주 에리얼이 흑인이어서 무서웠다, 레개 머리여서 공포였다는 식의 언설을 공공연히 마혀, 어린 시절 추억 속의 (붉은 머리 백인) 인어공주를 돌려달라는 말은 식민지 침략 시절이 아름다웠다는 말과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무엇보다 《인어공주》의 애니메이션(1989년)과 TV판(1992-1994)이 나오던 시절은 인종차별이 공공연했으며 대중 매체에서 흑인 캐릭터는 조연인 경우가 더 많았다. 흑인 감독이 1990년대 들어 흑인을 주인공 삼아, 괜찮은 캐릭터를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이들 감독 대부분이 두 번째 영화를 제작하는데 실패했다. 당혹스럽겠지만 흑인시네마의 르네상스는 2010년대 후반으로 명명할 정도로 대중 매체에서 흑인 주인공의 등장은 드물고, 인기를 끌기 어려웠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최초의 흑인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작품은 무려 2009년 티아나(《공주와 개구리》)였다. 이 말은 초기 인어공주 에리얼이 붉은 머리 백인인 것은 인종이나 어종의 맥락에서 백인어야 해서가 아니다. 그 작품을 생산하던 시기의 인종차별과 백인중심주의가 만든 효과다. 즉 백인 에리얼은 아름다운 과거가 아니라 인종차별, 성차별, 이성애규범성, 장애혐오가 중첩된 지점에서 생산된 캐릭터일 뿐이다. 이것을 그저 기억 속의 소중한 캐릭터로 치환하는 행위는 폭력과 차별을 재생산하는데 동조할 위험을 내포한다.
《인어공주》를 둘러싼 논쟁은 그 작품 하나만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고 디즈니의 최근 작업 혹은 마블의 최근 작업에 대한 비난과 얽혀 있기도 하다. 최근 마블 영화가 재미 없는 이유가 PC(정치적 올바름)가 묻어서라는 식의 반응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그 평가의 정당성과 별개로, PC가 묻어서 재미가 없다는 말은 차별과 혐오가 기본값으로 존재해야 재미있다는 뜻인가? 여성은 수동적이고, 악당은 흑인이어야 하며, 아시안은 무능하거나 눈이 찢어진 모습이어야 재미있다는 뜻인가? 백인 남성이 흑인과 아시안과 장애인 등을 대량 학살하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뜻인가? PC가 묻어서 재미가 없다는 말은, 사실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며, 충격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마블 영화는 PC가 묻어서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제대로 사유하고 고민할 줄 모르는 제작자가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에 서사는 못 입히면서 PC나 다양성으로 포장하려 들어서 재미가 없는 것이다. 기획자나 제작자가 아이언맨 혹은 토니 스타크에게는 서사를 부여할 수 있는 상상력(혹은 공감)이 있지만, 캡틴 마블이나 다른 여러 새로운 캐릭터에게는 제대로 된 서사를 부여할 상상력이 부재함에도 본인들이 작품을 제대로 제작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지금의 재미없는 마블 영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PC가 묻어 재미가 없다면, 이제 아시안 혹은 한국인을 향한 혐오도 용인하고 백인이 아닌 인종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위험하고 열악한 방식으로 묘사해도 용인할 수 있는가? 이런 모든 문제제기는 PC의 효과들인데 왜 어떤 PC는 가치 있는 진전이자 변화이며, 어떤 PC는 작품을 망치는 최악으로 인식되는가?
추억과 취향은 언제나 가장 정치적인 의제이며, 사회적 편견, 차별, 구조적 억압이 중첩된 방식으로 구성된다. 좋았던 옛시절은 문동은의 서술인지, 박연진의 서술인지 섬세하고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50H50 칼럼🍯)

AI 시대에 글쓰기와 연구하기의 조건 변화 1

2022년 11월 즈음, 챗GPT가 공개되었다. AI와 관련한 소식, 정보, 뉴스는 언제나 들려왔고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AI와 관련한 소식이 새삼스럽게 충격을 줄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고민했다. 하지만 챗GPT의 충격은 상당했다. 성능은 상당했고, 20년 넘게 특정 주제의 AI를 연구해온 연구자들이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좌절하거나 암울해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널을 중심으로 챗GPT가 공동 저자가 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몇몇 투고 논문에서 챗GPT를 사용한 뒤 저자명에 챗GPT를 등록했다. 챗GPT는 보조 도구인데 논문의 공저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챗GPT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논문 요약 정리 능력 또한 괜찮은 편인데 이런 공헌을 했다면 공동 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챗GPT가 아닌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공저자로 등재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챗GPT라는 AI라면? 만약 챗GPT가 공저자가 될 수 있다면 그 공헌도는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혹은 세상 모든 논문이 챗GPT를 비롯한 AI를 공저자로 등재시키기 시작한다면 모든 논문은 AI가 쓴 논문이 될 수도 있는데 이를 어찌할 것인가.
돌이켜 고민해볼 때, 챗GPT가 공저자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기존의 학제에서는 논란이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관련 전공 분야만 심각한 화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큰 파급을 일으켰다. 일단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통상적으로 제출하는 글쓰기 과제를 챗GPT로 작성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 뉴욕시는 학교에서 챗GPT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고 이탈리아는 국가 차원에서 챗GPT를 차단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AI의 윤리를 가르치는 대학 교수는 대다수의 수강생이 챗GPT를 사용해서 에세이를 쓰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평가의 방식을 고민한다고 밝혔다. 이제 숙제나 시험은 집에서 작성한 다음 제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강의실에서 펜으로 작성하도록 요구하거나, 구두 시험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고민도 등장했다. AI의 윤리를 다루는 수업에서 구두로 시험을 칠 수 있다는 고민에, 일군의 사람들은 AI를 모르는 AI 수업이라고 평했지만 아마도 대다수의 강사나 교수라면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AI 시대에 글쓰기는 무엇인가. 하지만 이 질문을 감당하기도 전에 구글이 나섰다. 구글은 전세계에서 AI와 관련해서 가장 앞선 기업이라고 평가받았지만, 구글 서비스에 조심스럽게 혹은 잠수함패치처럼 알게 모르게 AI 기술을 적용했지 챗GPT와 같은 서비스를 만들지는 않았다. 몇 년 전에는 구글 어시스턴트가 알아서 전화해서, 나의 일정과 경로를 파악한 다음 알아서 예약을 하는 상황을 시연했다가 상당한 우려를 듣기도 했다. 그러니 AI 서비스의 공개에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무엇보다 챗GPT 같은 서비스에서 광고를 붙이는 방법을 찾지 않는다면 구글은 챗GPT 같은 서비스를 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전망이 무엇이든 챗GPT로 인해 이제 구글은 끝났다는 세평이 넘쳐났고 구글은 한물 간 기업, 뒤쳐진 기업, 곧 망할 기업과 같은 식으로 말하는 이들도 넘쳐났다. 결국 구글도 챗GPT 같은 서비스로 구글 바드를 출시했다. 공개 시연을 한 날 구글 바드는 틀린 답변을 제출했고, 욕만 먹었다. 챗GPT도 할루시네이션 현상이 빈번했고 그래서 세종대왕이 맥북을 집어 던진 매우 유명한 사건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챗GPT에게만 용인될 뿐 구글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구글 바드의 공개는 이제 진짜 구글은 끝났다는 세평을 입증하는 것만 같았다.
한편, 나는 몇 년 째 대학원 수업을 진행하고 있고, 16주 중 한 주를 따로 할당해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학원생이라고 해서 글쓰기 문법을 아는 것은 아니며, 논문 쓰기는 생각보다 어렵고 기술적인 곤란함이 많지만 이를 알려주는 곳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주로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번 글쓰기 수업에서는 AI 시대의 글쓰기를 다루어야겠다고 고민했다. 저널에서 공저자 논쟁이 발생했다면 더이상 미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AI 시대의 글쓰기를 다루겠다고 했을 때 수강생들은 이미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해왔다. 챗GPT나 구글 바드를 사용해본 이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AI가 나보다 글을 더 잘 쓰고, 더 똑똑하다는 것을. 그러니 AI를 사용해본 사람일 수록 글쓰기와 연구하기에 곤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우선 비전공자가 이해하는 AI의 발달사를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했다(2000년대 이후의 유명한 사건만 다뤘다). 무엇보다 통상 기술과 관련한 세간의 유행을 한때의 유행으로 취급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현실인데, 기술과 관련한 세간의 유행어는 많은 이들에게는 한때의 유행어 같았겠지만 그 모든 유행은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사용하는 기술이다. 그러니 구글 바드나 챗GPT를 무시하지 말고 적극 사용해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물론 AI를 적극 사용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데, 일단 대학 행정팀에서는 AI를 이용한 표절 문제 등이 발생할 수 있으니 교육이 필요하다는 공문을 발송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통상의 교육은 기존의 지식을 가르치고, 이를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을 보는 형식을 취한다. 시험은 객관식일 수도 있고 주관식일 수도 있으며, 주제를 주고 자신의 고민을 작성하도록 하는 에세이 형식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이런 지식을 아는 것, 정보를 충분히 알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중요하며, 에세이 형식은 글쓰기 능력이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AI 시대에 글쓰기에 대한 통상의 평가, 지식 습득에 대한 통상의 평가는 괜찮은가? 이것은 방송에 나오는 일군의 패널이 적극 질문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AI를 적극 사용해본 교수, 연구자, 연구소장, 기자 등은 모두 글쓰기가 더이상 평가 지표가 될 수 없으며 새로운 질문과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대학에서 혹은 교육에서 평가 방식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과거로 경유해보자. 2000년대 중반 즈음, 나는 학부 강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매우 당황했었다. 나는 게일 루빈의 그 유명한 논문 “성을 사유하기”를 말했는데, 사회학과 여성학을 전공한 학부 강사의 반응은 의외였다. “게일 루빈이 새로운 글을 썼어요?” 그 강사는 루빈의 “여성거래”는 알고 있었지만 “성을 사유하기”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강사가 지나치게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고민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역사를 다시 살필 수 있게 되면서 당시 나의 평가는 매우 잘못되고 멍청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게일 루빈의 책 『일탈』 서문에도 나온다. 루빈은 1960-70년대 자신이 다닌 대학의 도서관이 다행스럽게도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괜찮은 도서와 자료를 소장하고 있었고 도서관 사서는 이와 관련한 괜찮은 목록을 만들어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의 언어로 번역하면, 게일 루빈의 말은 그 시절 구글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구글이 등장하기 전, 지식은 내가 다니는 대학 도서관에서 내가 열람할 수 있는 도서의 양과 종류로 결정되었다.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서 루빈의 “성을 사유하기”를 수록한 책이 없었다면 그 논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논문과 같았다. 혹은 존재는 알아도 쉽게 접근할 수 없기에 소문 속에만 존재하는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구글의 등장 이후 정보는 더이상 내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아니, 이런 말 자체가 진부하고 태만한 내용인 시대다. 달리 말해 구글 이전(BG, Before Google?), 새로운 정보와 뉴스를 아는 것만으로 똑똑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구글 이후, 새로운 정보와 뉴스를 단순히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정보와 뉴스를 어떻게 조합하는가, 이 조합을 통해 어떤 사유과 통찰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가 연구자 혹은 공부 노동자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니 그 강사가 루빈의 논문 “성을 사유하기”를 몰랐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부당한 행동에 가까웠다. 이런저런 것을 다 떠나, 전공과 무관한 논문과 논의를 모르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럼 AI 시대에 지식의 척도는 무엇이 될까? 새로운 정보 습득에서 정보의 조합과 재배치로 이동했다면 AI 시대는 어떻게 바뀔까? 이런 고민을 하는 중에 구글은 2023 구글 I/O를 통해 새로운 기술 발표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 AI의 전면 배치였고(얼추 10년 전에 구글은 이미 AI 퍼스트를 외쳤지만…) 구글의 대부분 서비스에 AI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제 미국 거주자에 한정해서지만 구글 검색에 구글 바드가 바로 적용되었고, 지역과 큰 상관없이(하지만 현재로서는 언어는 영어 뿐인 듯한데) 구글 워크스페이스에 DUET AI가 적용되었고, 지메일에도 AI가 적용되었다(MS의 코파일럿과 비슷한 서비스다). 모든 서비스에 AI가 적용되었고 기본값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아…
나는 수업의 기말 페이퍼를 작성할 때 몇 가지 조건을 주는 편이다. 분량이나 참고문헌 활용 방식 등등. 그리고 이번 학기에는 반드시 챗GPT든 구글 바드든 AI를 전체 작업의 ⅓ 정도로 활용할 것을 추가했다. 30% 정도로 제한한 이유는 그래도 기말 페이퍼의 제1 저자라면 70% 정도는 직접 작업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점이며, AI의 활용을 아직은 제2 저자 정도로만 제약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내가 이런 조건을 걸지 않아도 누군가는 AI를 적극 사용할 것이며(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AI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구글 서비스에 전면 적용되었다면 이제 AI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몇 년 안 지나 AI를 이용하는 것은 구글 검색을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이걸 조건으로 사용한다고?”라고 반응하며. (물론 어디까지가 나의 역할이고 어디까지가 AI의 역할인지는 모호하지만…)
이 글의 생성적 결론은 한두 달 뒤 데이터가 갱신되면 그때 다시 쓰여질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AI를 통한 글쓰기와 연구하기는 이제 구글링한다는 오래된 표현처럼 기본값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더 적극적으로 사용해야지. AI 시대에 무엇이 연구자, 공부노동자의 역할이 될 것인지를 적극 고민하는 것, 이것이 어쩌면 공부 노동자의 출발점인지도 모르겠다. [50H50 칼럼]
+딴소리 추가.
구글 AI와 관련해서 약오르는 점. 구글 나우라고 불린 적도 있고 구글 런처로 불린 적도 있고 요즘은 구글 홈이라고 불리는 것 같은데. 구글에 내가 관심이 있거나 있을 법한 뉴스를 추첨해준다. 그런데 주중에는 블라인드 인기글을 추천해주고 주말이면 김박사넷 인기글을 추천해줌… 구글 너어는 진짜… (심지어 둘 다 사용하지 않는 곳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