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청소년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메모: 퀴어 정치학은 성인의 정치학인가?

수업에서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실천과 관련한 논의를 다루었다.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논의는, 다른 많은 의제처럼 매우 다양한 세부 의제를 형성하기 때문에 간단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자리에서는 아동 청소년의 성적 실천을 해도 괜찮으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논쟁을 할 수도 있다. 룸카페를 이용하는 청소년의 ‘실태’라는 최근 보도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텐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그 자체로 사실상 범죄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에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실천을 다루는 논의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내용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수업의 맥락에서, 아동 청소년이 성적 실천을 해도 괜찮냐 아니냐라는 식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이는 상당히 소모적인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찬반이라는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어서는 곤란하며, 찬반으로 흐를 여지가 존재한다면 쟁점을 다른 지형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룬 논의의 기초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아동과 성인 사이의 관계 혹은 세대 간의 사랑을 둘러싼 퀴어 운동의 대응(Gamson의 “Messages of Exclusion: Gender, Movements, and Symbolic Boundaries”). 둘째, 아동이나 청소년의 정체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동성애 규범성의 강화 혹은 트랜스젠더퀴어 삭제의 정당화(Bryant의 “In Defense of Gay Children Progay Homophobia and the Production of Homonormativity”). 마지막으로 아동의 순수함을 바라는 성인의 아동 오리엔탈리즘(kid orientalism) 문제(Stockton의 “The Queer Child Now and Its Paradoxical Global Effects”). [칼럼이라 정확한 인용 생략]
두 번째 논의는 브라이언트가 논하는 주제인데, 1980년 DSM-III판에 트랜스젠더퀴어가 정신병 진단 범주로 등록되고 아동의 GID(젠더 정체성 장애, 이하 GIDC)를 진단할 수 있으면서 발생했다. 게이나 퀴어 비평가들은 GIDC 진단이 여성스러운 남성 아동을 교정하여 성인 동성애자가 되지 못 하도록 막는다고, 요즘 표현으로 전환 치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비평가들은 GIDC 진단이 1973년 DSM에서 동성애가 삭제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의료계가 동성애를 여전히 정신병으로 진단하기 위한 의도로 추가한 진단명, 즉 동성애 혐오에 근거한 진단명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GIDC 항목을 만드는데 참여한 일군의 의료진은 이 범주가 동성애 아동을 진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린 시절 여성스러운 남자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게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고 해서 GIDC가 반드시 성인이 되었을 때 게이가 될 잠재적 동성애자를 치료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이들 의료진이 주장하는 논의의 핵심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퀴어는 다르며, GIDC 진단과 치료는 성적 지향 혹은 섹슈얼리티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를 치료하는 것으로 동성애가 문제가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가 문제라는 점이다. 이 논쟁에 대해 브라이언트는 GIDC를 둘러싼 퀴어 비평가와 의료전문가 사이의 논쟁이 특정한 종류의 동성애자를 생산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를 주변화, 병리화하는데 동조한다고 비판한다.
브라이언트의 논쟁은 다각도로 고민할 지점을 제안하는데, 당장 오늘날 스포츠에서 12살 이전부터 의료적 조치를 해야만 여성으로 인정해준다는 식의 규정을 둘러싼 문제에 기입될 수 있다. GIDC를 둘러싼 논쟁은 아동의 잠재적 동성애자 되기의 가능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사유하지만, 트랜스젠더퀴어 아동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젠더는 치료의 대상이라는 논쟁, 트랜스젠더퀴어 아동 청소년이 경험하는 진단 과정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이슈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 병리화 시도를 문제 삼지도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12살 이전에 의료적 조치를 하도록 요구하는 스포츠계의 요구가 마치 중립적 요구 조건처럼 들리는 찰나에도 어떻게 사회적 무관심과 병리화, 혐오가 내재하고 있는 불가능한 기획인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브라이언트의 논쟁은 단순히 동성애와 트랜스젠더퀴어 사이의 규범성 논쟁에 그치지 않고, 지금 현재 나타나는 트랜스젠더퀴어 혐오의 역사성이자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혐오의 층위와 위계를 다루는 논의로 재독해할 수 있다. 물론 브라이언트는 아동 청소년의 동성애 실천을 전-동성애(pre-homosexual)라고 표현하고, 잠재적으로 동성애자가 될 재원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동 청소년의 성적 실천이나 섹슈얼리티 고민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며 이는 심각한 문제점이다. 더 정확하게, 브라이언트가 아동 청소년의 동성애를 잠재적 상태로 이해하는지, GIDC를 둘러싼 논쟁에 참여한 이들의 태도가 그러한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데, 그 태도가 아동 청소년의 성적 실천이나 섹슈얼리티 모색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 태도로 읽힌다. 그럼에도 아동 청소년의 성적 실천이나 젠더 표현을 둘러싼 퀴어 커뮤니티에 내재하는 혐오의 층위를 탐색하는 이 작업은 혐오와 위계의 역사를 살피는 중요한 작업이다.
셋째, 스톡튼의 논의는 아동을 섹슈얼리티 혹은 성적 실천을 향한 성인들의 공포를 문제 삼고, 아동을 순수한 존재로 다루고자 하는 작업이 사실은 아동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지적한다(스톡튼은 아동child만 다룬다). 무엇보다 이러한 식의 순수한 아동 형상이 미국 내에서 구해지기 어려워지자, 순수한 아동이라는 표상을 아웃소싱해서 비서구사회의 아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통해 구현하고 재현한다고 지적한다(여기서 다루지 않는 다른 중요한 키워드를 몇 개 더 제안한다). 이 맥락에서 스특튼이 제안하는 개념어 아동 오리엔탈리즘은 아동은 순수해야 한다는 식의 판타지를 통해 계속해서 성인들은 아동의 고통을 욕망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처한 아동을 원하는 동시에 그 아동의 표정이나 삶에서 순수함, 천진난만함을 길어내고자 하는 그 과정을 지칭한다. 즉 성인이 주도하는 아동 논의에서 아동의 언어는 삭제되고 성인의 바람, 성인이 욕망만이 남고 있으며 이것이 서구 사회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워지면서 비서구-저개발 국가의 아동을 통해 구현된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이자 동시에 아동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를 수 있다.
스톡튼의 논의는 아동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논의에서 아동 청소년 당사자의 목소리가 삭제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또 다른 작업이기도 하다. 스톡튼의 논의가 주는 중요한 질문거리 중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쉽게 만나는 당사자주의와 관련이 있다. 나는 한국 사회, 한국의 퀴어 커뮤니티만을 주요 문화권으로 경험했는데 이들 공동체만큼 당사자주의가 강한 곳을 만나지 못했다. 경험해서 안다,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 비당사자가 뭔데 말하냐는 식의 태도가 갖는 위험성에 모두가 동의할 때에도, 많은 이들이 뒤돌아서서 비당사자의 언어를 비난하고 당사자의 언어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아동 청소년은 당사자가 될 수 있는가? 아동 청소년은 성인이 원하는 언어의 증인이 될 때, 성인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의 미숙한 판본을 재현하는 존재일 때만 그 목소리가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관련해서 서경님 글 참조). 그러니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성원권은 아동 청소년 자신일 때에도 그 성원권 자체가 상정되지 않는다. 대신 언제나 가장 힘들고 피해를 많이 본 존재로만 재현되거나 가장 악랄한 가해자의 모습으로만 재현되고, 그 피해나 가해 속에서 성인들은 그 나이대의 ‘싱그러운 해맑음’만을 바란다는 점에서 영원히 사회적 성원권을 박탈당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것을 스톡튼은 아동 오리엔탈리즘으로 명명하고 이 개념어는 상당히 유용하다(이 논문을 추천해준 정래님 감사!).
첫째, 갬슨의 논문은 우리와 그들 사이의 정체성 구성, 정체성 경계의 구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탐색한다. 통상 우리와 그들의 구조는 주인공과 적대자라는 양자 구조로 상정되지만 갬슨은 여기에 청중을 도입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사건은 퀴어 운동사에서 중요한 장면이다. 1990년대 초 ILGA가 유엔의 중요한 지위를 획득하려고 했을 때, ILGA의 소속 단체였던 NAMBLA로 인해 동성애는 아동 성범죄자로 비난을 받으며 지위를 획득하기 어려워졌다. NAMBLA는 1970년대부터 활동한 퀴어 단체로 성인과 아동 청소년 사이의 연애 관계 혹은 세대 간의 사랑을 지지하는 단체다. 이 단체가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미국 대중과 정치권 등은 ILGA와 동성애는 아동 성범죄자, 소아성애집단과 같은 식으로 맹비난했다. 이에 ILGA는 미국 대중의 목소리에 동조하며 NAMBLA를 비난하며 퇴출시키는 결정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기술하며 갬슨은 정체성 구성에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단순한 적대 구조를 상정하지 않고 우리와 그들, 그리고 우리와 그들 사이의 논쟁을 청취하는 청중의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퀴어와 그 혐오자는 미국 사회에서 계속해서 적대 전선을 형성했지만 NAMBLA의 존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신 미국 대중과 유엔의 지위라는 새로운 청중이 등장하면서 적절한 우리의 성원권은 새롭게 재편되었고 우리의 오랜 구성원 중 일부는 그들로 추방되었다.
그런데 갬슨의 논의를 통해 내가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약간 달랐다. 아동 청소년은 성적 실천, 섹슈얼리티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럼 아동 청소년이 만나는 사람이 성인이거나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난다면 그 관계에도 동의할 것인가? 내가 가끔씩 보는 몇몇 퀴어 유튜버는 연애 상담을 자주 해주는데, 매번 10대와 만나는 20대 이상의 성인을 맹비난하는 입장을 취한다. 종종 나이 차이가 4살 이상만 나도 비난하거나 이상하다는 식의 반응도 한다. 이것은 내가 속해있는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쉽게 접하는 반응인데 30대가 20대 초반에게 고백했다고 맹비난하며 징그럽다는 말한 것을 들은 적도 있다. 이것은 나이 차이가 그 자체로 상호 관계 구성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구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 고민을 확장해서 아동 청소년이 자율적으로 성적 실천을 하고 섹슈얼리티를 고민할 수 있다면 성인과 만나는 것은 왜 문제로, 범죄로, 잘못으로 상정되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이것은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고민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그 한계와 경계가 구축되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또한 청소년 섹슈얼리티 실천에서 그 결정의 가능성은 언제나 충분히 열려 있는 것 같은 환상이 있는 특정 커뮤니티에서도 빈번하게 강고한 한계와 보호주의가 작동함을 말해준다. ILGA와 NAMBLA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특정 단체를 추방하면서까지 섹슈얼리티 정성상과 규범성, 그리고 유엔의 지위를 획득하고자 했는가의 문제를 넘어, 퀴어 규범성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계속해서 아동 청소년의 목소리가 삭제되거나 성인이 설정한 한계 내에서만 다루어지도록 했는가를 질문하도록 한다.
이제 앞의 논의들을 다 연결해보자. 이들 논의를 연결해서는, 아동과 성인의 연애 관계는 정당하다거나 심각한 범죄라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단순한 결론은 사유의 포기일 뿐만 아니라 규범과 폭력에 공모하는 행위가 된다. 대신 이들 논의를 연결해서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퀴어 정치학은 성인을 위한 정치학인가? 퀴어 섹슈얼리티는 성인의 섹슈얼리티만을 정당한 실천으로 삼는가? 퀴어 정치학에서도 아동 청소년은 여전히 금지와 금기와 규제와 보호주의 속에 배치되어야 하는 존재인가? 퀴어와 아동 청소년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ILGA의 판단에 동의하든, NAMBLA의 입장에 동의하든 중요한 핵심은 찬반에 있지 않다. 핵심은 퀴어 정치학이 아동과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미숙하고 퀴어 되기의 잠재적 가능성, 재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50H50 칼럼]

한겨레 유감, 김도훈 유감 혹은 스포츠에서 트랜스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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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400위권 남성 수영선수, 여성 되고 1위에 오르다”  [이 칼럼에 접근할 수 없다면 이미지 | PDF1 | PDF2]
놀랍게도 김도훈의 칼럼은 미국의 공화당 의원, 혹은 한국 자유공화당 소속 정치인이나 지지자가 쓴 글이 아니며, 조선일보나 데일리안, 크리스천투데이와 같은 매체에 게재된 글이 아니다. 이 놀라움이 내가 쓰고 있는 이 칼럼의 결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고, 그것이 지금 내가 쓰는 이 칼럼의 핵심이다.
올 초 세계육상연맹(IAAF)은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를 금지하는 결정을 했다. 이 문장을 정확하게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트랜스젠더퀴어의 스포츠 참여 금지가 아니라, mtf/트랜스여성의 여성 경기 참여 금지가 핵심이다. 올림픽을 비롯한 스포츠에서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의 참여를 둘러싼 논쟁은 100년의 역사를 지니는데, 그럼에도 ftm/트랜스남성의 남성 경기 참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트랜스여성이 여성 선수로 스포츠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느냐만이 문제가 된다.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 다른 뉴스. 이곳의 뉴스브리핑으로 소개했고,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상황을 추가하자. 현재 미국은 공화당이 주류를 이루는 주(states)를 중심으로 반-트랜스 법안의 입법이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다. 트럼프 때보다 지금이 더 구체적이고 심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주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다음의 법을 제정했거나, 의회에서 논의하고 있거나, 입법 준비를 하고 있다. ㄱ. 트랜스여성의 공교육 및 대학교 여성 스포츠 팀 참여 금지, ㄴ. 청소년 트랜스젠더에 필요한 의료적 조치(2차 성징 억제 호르몬, 자신이 원하는 호르몬 투여, 수술 등 의료적 조치)에 접근 금지 및 이 과정에 도움을 주는 의료인 처벌, ㄷ. 트랜스젠더퀴어가 자기에게 더 편안한(혹은 덜 불편한) 젠더 범주의 화장실 사용 금지. 현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주도의 이러한 흐름에 비판적이지만, 미 행정부가 마련한 제안서는 예외를 허용함으로써 트랜스를 배제하는 현재의 흐름을 사실상 막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뉴스브리핑 #003에서 설명할 것이다).
스포츠에서 트랜스여성의 참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오래되었지만 언제나 그 논리 구조는 동일했다. 트랜스여성은 사실상 남성이고 남성은 여성보다 근육이나 체력 등이 더 뛰어나고 그러니 트랜스여성이 여성 경기에 참여하면 무조건 우승할 것이다. 1970년대 르네 리차드가 성전환 수술을 한 뒤 여성 선수로 계속해서 활동하고자 했을 때, 당시 대부분의 언론이 이런 기조로 기사를 썼다. 김도훈 역시 이 기조를 반복하는데, 이런 편견을 가장 선정적으로 표현하는 문구는 제목과 본문 모두에 나타나는데, “남성부 462위에서 여성부 1위”이다. 남성 스포츠 선수의 400위권 능력은 여성 선수 1위에 준하는 능력이다라는 표현. 이 말은 여성 스포츠 선수 혹은 여성 전문가, 여성의 신체 능력은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라는 함의를 내재한다.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 능력이 열등하고, 그래서 여성 스포츠는 별볼일 없다는 암시를 내재한다. 그러니까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를 반대하는 논리는 트랜스여성은 여성인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진입하지도 못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 능력이 열등하다는 오래된 차별 인식을 트랜스젠더퀴어를 경유하여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김도훈이 [피지컬: 100]을 언급하는 이유도 정확하게 여기에 있다. ‘여성은 남성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신체 능력이 열등하며 그러니 결코 이길 수 없다.’ 이 메시지를 먼저 독해해야 한다.
놀랍지 않게도, 미국에서 반-트랜스 법을 제정하고 있는 공화당 의원이 그 법안 제정을 정당화하는 논리 역시 동일하다. (비트랜스)여성 스포츠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비트랜스)여성의 스포츠 참여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mtf/트랜스여성의 여성 스포츠 참여를 막하야 하고 그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을 이룬다. 비트랜스여성이 스포츠에 참여하기 어렵고, 스포츠에서 차별을 받는 이유, 기회가 박탈되는 이유가 트랜스여성 때문이라는 논리가 생성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트랜스젠더퀴어의 차별을 법제화하는 그 법안들은 그 내용이 길지 않다. 예를 들어 메인주 오거스타는 트랜스여성의 여성 스포츠 팀 참여를 금지하는 법안을 단 한 문장으로 만들었고, 이름과 인칭대명사(pronouns)와 관련한 법안은 정의 조항을 빼면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뉴스브리핑 #003 참조 – 공개예정]. 논리 같은 것도 없고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냥 여성(female, woman, girl)을 보호하기 위해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한다고 선언할 뿐이다. 이 문장에 담긴 함의는 여성의 스포츠 능력은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인식이지만 교묘하게도 이 인식은 트랜스젠더퀴어를 향한 혐오로 인해 은폐된다. 트랜스젠더퀴어가 여성 혐오의 기나긴 연원이자 원인이며 여성 억압과 여성을 향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는 제1 이유가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 여학생이 운동장을 사용할 수 없다고 문제제기한 초등학교 교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억하자.)
앞서 말했듯,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를 둘러싼 논쟁은 이미 100년의 역사를 지닌다. 그 역사는 반복되고 동일한 논리가 재생산되는 시간이었지만,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가 사후 허용된 경우가 있다. 그것은 트랜스여성이 여성부 경기에 참여했는데 여성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거나, 중간 정도의 성적을 낼 때였다. 패배는 여성다움의 상징인가? 패배는 여성되기의 핵심 조건이자 여성 스포츠 선수의 자격이 되는가?
김도훈은 미국이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를 허용하는 반면 국제수영연맹이 12살 이전에 호르몬 투여를 시작했을 경우에만 트랜스여성도 여성부 경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한다. 이것을 “규정과 규정이 부딪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아니다. 미국은 이미 청소년의 의료적 접근권을 박탈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무엇보다 12살 이전에 의료적 조치에 접근하는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어렵고 곤란하며 트랜스 활동가들을 분노케하는 의제다. “후회하면 어떡하냐”, “그 어린 나이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을리 없다” 기타 등등. 룸카페를 둘러싼 청소년 섹슈얼리티 논쟁이 구성된 방식을 떠올려보자. 아동이나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실천, 의료적 조치는 더 큰 저항을 부르는다. 이 모든 것이 아동에게, 청소년에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혐오 세력은 언제나 아동 보호를 근거로 퀴어 혐오를 정당화하며, 이 논리는 2023년 서울시가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시청광장에서 개최할 수 없도록 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니 규정과 규정이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과 불가능의 중첩이며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하기 위한 역사적 맥락과 현재 노력의 중첩이다. 규정과 규정이 부딪힌다는 식의 표현은 사실도 아니고, 중립도 아니며 혐오 세력의 논리를 정치적 의견으로 승인하는 태도다.
그래서 나는 김도훈의 칼럼을 읽으며 가장 화가난 문구는 이 의제를 “윤리적 딜레마”와 “다양성의 시대”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트랜스여성의 스포츠 참여를 둘러싼 논쟁을 윤리적 딜레마 즉 비트랜스여성의 스포츠 참여 권한과 트랜스여성의 스포츠 참여 권한의 대립으로 만드는 행태는 이 사안을 둘러싼 오랜 논쟁을 모두 은폐한다. 마치 지금 현재 발생하는 딜레마처럼 만들지만 스포츠에서 이 논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보다 여성 범주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훨씬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지닌 의제다. 누가 여성인가, 여성 범주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정함에 있어 12살 이전에 성전환과 관련한 의료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거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일정 비율 이하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여성 범주를 경험적 본질주의, 나이 본질주의,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환원시킨다. 결국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 혹은 의료적 진단을 통해 결정된다는 논리와 같다. 트랜스젠더퀴어의 스포츠 참여를 둘러싼 논쟁이 복잡한 이유는 여성 범주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훨씬 어렵고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는 사실이 한 축에 있고, 이 논쟁에서 ftm/트랜스남성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또 다른 축에 위치하고 있다. 무엇보다 누가 인간으로, 스포츠를 할 적절한 자격이 있는 존재로, 안전하고 평등하게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로 논쟁이 진행되어온 역사를 “윤리적 딜레마’’로 만드는 것은 “다양성의 시대”를 적극 사유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다양성을 둘러싼 논의와 운동의 전략을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며 윤리가 구성되는 방식을 사유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더 가깝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칼럼을 읽고 매우 분노했다. 이 글 서두에서 기독당이나 공화당 지지자가 쓴 칼럼은 아닌지, 크리스천투데이 같은 매체에서 쓴 칼럼은 아닌지 질문했던 것은 조롱의 의도가 아니다. 평소 진보적 입장을 취하거나, 퀴어 의제를 적극 지지하는 이들이 어떻게 트랜스젠더퀴어를 둘러싼 논쟁에서 재빠르게 김도훈과 같은 태세를 취하는지, 그런 칼럼을 읽을 가치가 있는 내용처럼 게재하는지를 질문하기 위해서다. 진보 진영에서 퀴어 의제는 지지하면서 트랜스젠더퀴어는 손쉽게 혐오하는 태도는 197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다. 현재 영국은 트랜스 혐오가 가장 극심한 국가 중 하나이며, J.K. 롤링이 트랜스 혐오를 표출함에도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이유도 소위 진보 진영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혹은 여성 인권을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트랜스젠더퀴어를 향한 혐오를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신필규 “해리포터 작가 또 헛소리… 정치인들이 잘못했네” 혹은 숀 페이가 쓴 『트랜스젠더 이슈』(강동혁 옮김) 참조). 그러니 글 서두에 먼저 쓴 결론은 조롱이나 비아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축적된 분노이며, 불안함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논쟁의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히기 위해서다. [50H50 칼럼]

개입의 정치

2015년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일군의 퀴어 혐오, 트랜스 혐오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집단이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교수라는 직함을 단 윤김지영도 있었는데, 윤김지영은 트랜스 혐오와 여성 범주의 본질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주장을 전개했다. SNS에서 출발하여 오프라인의 강의, 그리고 출판, 강연 영상 등으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본질주의적 페미니즘 논리를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트랜스 혐오에 논리와 이론을 제공했다.
이제는 회고담처럼 말해지는 이 역사에서, 나는 주변의 몇몇 지인이 내게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언제적 혐오 논리냐, 윤김지영을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것도 아깝다, 비판하는 글이 오히려 윤김지영을 키워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논리는 윤김지영이나 국지혜와 같은 이들이 트랜스 혐오를 전면에 내세우는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비판을 하지 않는 심정적 근거가 되었다.
그 심정적 근거를 아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어떤 사건이나 상황, 논의에 개입할 때면 빈번하게 드는 고민이기도 하다. 괜히 반박글을 씀으로써 상대를 띄워주는 것은 아닐까. 괜히 판을 키워주는 것은 아닐까. 괜히 혐오의 논리를 정말로 이론적 논거로 승인해주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매 순간 이런 고민을 하고, 그래서 논쟁이나 사건에 개입하기를 망설인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적극 참여했고 어떤 상황에서는 소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분노하면서도 일단은 말을 삼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참여하고, 적극 발언했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지금 발생하는 사건에 개입하기. 뒤늦은 후회에도 현재에 개입하는 실천은 무척 어려운 일인데, 이와 관련한 고민은 게일 루빈의 책 『일탈』 서문에도 나와 있다. 루빈은 언제나 지금 현재에 개입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고, 루빈의 유명한 글의 상당수도 현재에 개입하며 사유를 재편성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루빈은 현재에 개입하는 학술적 실천의 어려움을 말하면서도 그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페미니즘 연구, 퀴어 연구, 트랜스젠더퀴어 연구에 참여하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라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혐오와 적대의 분위기에서 어떤 식으로 개입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수세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며, 내가 지지하거나 내가 속한 집단의 상황을 피해자화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으면서, 내가 무조건 옳다는 오만함을 내포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논의의 가능성을 생산할 것인가와 연결된 고민이다. 이분법의 선악 구도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논의의 가능성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나는 요즘 쓰고 있는 논문의 서론을 완전히 갈아 엎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것은 개입하지 않는 태도가 어떤 여파를 만드는가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윤김지영이나 국지혜를 직접 언급하는 비판은 사실 별로 부담스럽지 않다. 실명 비판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그 논쟁을 보고 배운 나는 실명 비판을 중요한 태도로 익혀 왔고 그래서 곧잘 인사를 나누던 지인도 실명으로 비판하는 글을 여럿 쓰기도 했다. 그러니 윤김지영이나 국지혜 같은 인물을 비판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문제는 이런 비판이 상대방의 판을 키워주는 태도라는 저어함이 결국 그들이 기고만장해질 수 있는 토대는 아니었는가라는 점이다.
2001년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 일군의 페미니스트는 트랜스젠더퀴어를 적대하는 글을 썼지만, 많은 페미니스트는 이와 관련해서 침묵했다. 그 시절 즈음 나와 친했던 페미니스트들은 하리수 혹은 트랜스젠더퀴어를 부정하는 논리를 설파했지만, 그 언어들이 직접 출판되어 남아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구두로만 돌았던 그 논리는 어느 순간 트랜스젠더퀴어가 인권 의제로 재편되면서 그냥 없었던 일처럼 잊혔다. 돌이켜 고민하면, 그때 적극적으로 논쟁을 히고, 논의를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당시에 내가 들었던, 혹은 사석에서만 유통되었던 트랜스젠더퀴어를 향한 적대나 혐오 논리를 공론화시켜야 했던 것은 아닐까.
혹은 2015년 이후 새롭게 부상한 트랜스 혐오 페미니즘 논의에 더 적극 개입하고 비판하며 새로운 논의 지형을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성소수자인권포럼이니 한국여성학회의 여름캠프를 비롯하여 여러 학회와 행사에서 트랜스 혐오를 전면에 내세운 일군의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장을 마련했다. 그러니 적극적 개입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더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논의의 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한다. 어떤 저어함, 망설임이 2021년 초에 잇따라 발생한 죽음의 도화선은 아니었을까.
놀랍게도 이 글을 쓴 나의 의도는 트랜스 혐오 페미니즘에 적극 개입하지 않은 나의 게으름이나 주류 페미니즘의 방임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최근 서울시는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하는 결정을 했다. 그런데 이 결정이 알려지자 민주당 지지자 중 일부는 문재인 때, 혹은 민주당 정권 때는 비판 목소리를 크게 내더니 윤석열, 오세훈 때는 조용히 있다며, 이렇게 될 줄 몰랐냐고 고소하다는 반응을 드러냈다. 저런 반응은 일일이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체적 난국이다. 그 중 하나만 짚는다면, ‘이렇게 될 줄 몰랐냐’라는 반응은 현재의 폭압적 정치를 정당화하고 승인하는 태도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왜 너희들은 더 적극적으로 낙선운동이나 반대 운동을 하지 않았느냐고 비판할 수 있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식의 태도는 패배주의적 태도, 현재의 문제를 당연시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현 정권의 행태에 적극 공모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렇게 될 줄 몰랐냐’라는 말은 현 상황에 비판하는 위치에 있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나는 정확하게 지금 이 상황에 개입하는 말을 보태고 싶었다. 요즘 들어 자주하는 고민은, 예를 들어 노동조합에 가장 적대적인 정권은 윤석열과 같은 극우 정권 아니라 민주당과 같은 중도보수 정권일 때라는 점이다. 윤석열을 비롯한 국민의힘 계열 정권은 노동조합을 노골적으로 탄압한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일 때는 노골적으로 탄압하지는 않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런 점에서는 민주당이 더 문제라는 지적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민주당 지지자는 노동조합을 비롯해서 인권 단체, 시민 단체 등 시위와 항의, 저항하는 모든 세력을 적대한다. 그래서 민주당 정권일 때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이 모이는 게시판이나 댓글에는 노조, 민주노총, 시민단체, 여성단체, 페미니즘 단체, 성소수자 단체를 향한 적대와 혐오가 넘쳐난다. 하지만 국민의힘 계열이 집권을 하면, 이들의 항의와 시위는 매우 정당하고 소중한 행동이 된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런 태도가, 서울퀴어문화축제를 향한 서울시의 횡포를 두고 민주당 지지자 중 일부가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비난하는 태도의 근거라고 고민한다.
이런 이유로 현재의 정치, 지금의 논쟁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논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저것들은 비판할 가치도 없다는 식의 태도가 ‘저것들’을 기고만장하게 만들고 커다란 세력으로 만든다. 지금 현재에 개입하지 않는 태도는 결국 간접적으로라도 ‘저것들’을 지지하는 행동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50H50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