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

또한 이러한 국가 폭력은 겉으로 보이지 않게 국민들의 모든 부분에 침투해 있었다. 막걸리 보안법과 어부 간첩 사건, 녹화 사업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막걸리를 마시고 홧김에 대통령 욕을 한 번 했다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사람들, 고기잡이배에서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었다가 돌아와 술자리에서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사람들, 학생 운동을 하다가 강제로 군대에 입대한 이후 시체가 되어 돌아온 사람들, 민주화 운동 때문에 경찰에 잡히기 싫어서 도망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체로 발견된 사람들, 국가안보는 민족 국가 성원들의 안전한 생활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건만, 국가 안보가 목적이 되어 국가 성원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국가 폭력의 기재들은 상화 간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공산주의’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노동자, 농민들의 기본권까지도 짓밟았다. 시위 중에 똥을 맞은 동일방직의 여공들, 야당 당사에서 동료를 읽은 YH의 여공들, 1980년대 중반 구로 공단의 노동자들, 대우 자동차 ․ 현대 중공업의 노동자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경제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경제 성장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건만, 경제 성장이 ‘목적’이 되고 인간은 그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수단이 목적이 될 때, 인간은 하찮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군의 오발 사고로 쿠르드인 한 명이 죽었다는 사실은 7개월이 지난 후에야 알려졌으니 말이다. 한국에 있는 미군들이 한국 경찰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면, 이라크에 있는 한국군들은 쿠르드 민병대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박태균, “국가의 이름으로, 애국의 이름으로”

1980년대 국가보안법 사건 중에는 ‘아이고 사건’이 있었다. 제주4․3으로 제주도에선 비슷한 날에 제사가 많은데, 제삿날 슬퍼서 “아이고, 아이고”하고 울었다는 이유로 잡아간 것이다. 명분은 “빨갱이”를 위해 슬퍼한다는 거였겠지?

라디오를 통해, 인터넷 언론들을 통해 파업이나 집회와 관련한 소식은 거의 항상 경제적인 소실과 연결해서 이야기 한다. 파업을 하기 전엔 사측에서 협상을 게을리 하고, 파업을 하면 언론에서 노동자들에게 뭇매를 퍼부으니 사측에 유리하다. 도대체 왜 협상이 안 되는지, 노동자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보도하는 기사는 드물고, 파업을 해야만 비로소 “관심”을 갖는다. 그것도 “선정적인” 내용일 때만 언론에서 다루기 시작하고 그래서 노동자들 혹은 집회와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폭력적이고 국가/국민의 존망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이다.

(물론 이때의 “노동자”는 단순히 노동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트랜스젠더도 동성애자도, 퀴어들도 동시에 노동자이고 비정규직이다. 물론 이들 중엔 고용주도 있지만. 그래서 “노동해방이 먼저냐 여성해방이 먼저냐”, “노동해방이 먼저냐 동성애해방이 먼저냐”와 같은 질문 혹은 문제제기는 무식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퀴어는 다른 모든 정체성과 무관하게 퀴어일 뿐이냐?)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환상, 희극과 비극의 공존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2006.11.30. 목, 20:05, 아트레온 8관 11층 E-10

요즘 무슨 영화가 하나, 하고 극장을 검색했다가, [판의 미로]가 한다는 걸 보고 망설임 없이, 오늘 당장 봐야겠다고 작정했다. 예전에 씨네21에서 이 영화와 관련한 간단한 글을 읽고 개봉하길 바랐던 흔적이 몸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광고는 “판타지”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자 뒷자리의 누군가가 말했다. “광고에 속았다!” 맞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데, 판타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타지 영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종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말들을 빈번하게 듣지만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를 밝히지는 않는 것 같다. 꼭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해야만 “환상”일까. 루인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다고 해석하는 편인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해석에 따른 현실, 즉 환상이다. “현실”이 있다면 왜 같은 공간에서 같은 회의를 했음에도 그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다른 식으로 그 내용과 분위기를 기억하고, 예전에 쓴 일기를 읽을 때면 지금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달라 당황할 일이 왜 있겠는가.

[스포일러 시작!]

이 영화의 환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요정과 궁전, 동화가 나오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는 전쟁, 죽음, 고문 그리고 정치적 분쟁이 동시에 나온다. 이렇게 나열하면 하나의 영화에 이런 요소들이 같이 있다는 것에 뜨악할 수도 있겠지만, 뜨악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 미로를 지키고 있는 판이 나오는 장면과 폭력적인 대령의 행동에 따른 공포가 맞물리고, 사람이 되고 싶은 허브의 뿌리가 불에 타 죽는 장면과 엄마의 죽음이 맞물린다. 오필리아가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길과 군대가 반정부군을 소탕하려는 장면 역시 교차한다.

이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인데, 희극과 비극이 주인공에게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죽음이 사실은 공주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어가면서 주인공인 오필리아는 드디어 공주가 되고 죽었다고 믿은 엄마가 왕비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순간 무엇을 희극이라고 무엇을 비극이라고 말할지 모호한데, 그것은 오필리아를 좋아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필리아 자신에게도 그렇다. 오필리아의 죽음은 오필리아에게 비극일까, 희극일까. 영화는 바로 이런 식의 이분법으로는 구분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음을 얘기하는데, “희극이야 비극이야”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물어보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설명도, 소통도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끝!]

올 해, 꽤나 몸에 드는 영화가 많았고, 그래서 몸에 드는 영화가 또 나오겠느냐고 중얼거렸는데, 취소다. 한 번 더 볼 거다. 정말 괜찮다.

글쓰기 언어의 변화

작년 8월에 쓴 글의 몇 문장을 읽다가 참 담백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갈 수록 문장은 복잡하게 꼬이고 언어는 길어지고 있다. 이렇게 무식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글을 다 읽는다는 건 고역인데, 윗 문장을 쓰고 다시 가서 확인했는데, 왜 그렇게 문장이 엉망이야?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