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 젠더, 할버스탐

수업 쪽글입니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정확하게 요약하는 것이 쪽글의 의도라 그렇게 적었습니다만… 할버스탐Judith Halberstam의 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뭐..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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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할버스탐(J. Jack Halberstam)의 글은 기술적 재생산 시대에 양육의 젠더 규범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몇 년 전 오프라 윈프리 쇼에 등장한 임신한 남성 토마스 비티(Thomas Beatie)로 논의를 시작하는 할버스탐은 양육에서, 모성과 부성에서 젠더 질서[gender order]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떤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지를 탐문한다.

ftm/트랜스남성인 토마스 비티는 파트너와의 협의 하에 자신이 직접 임신했고 이 사실을 인기방송에 공개하면서 ‘세계 최초 임신한 남성’이란 타이틀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 전에도 ftm/트랜스남성의 임신은 공공연했다. 또한 여성만이 임신을 하지 않음 혹은 젠더와 임신 및 출산의 분리 관련 논의는 제2 물결 페미니즘의 초기부터 진행되었다. 1970년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여성억압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임신과 출산을 여성이 전담하는데 있다고 해석하며 기술을 통해 여성이 더 이상 재생산을 하지 않는다면 여성은 해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Halberstam, 33-37). 비록 당시엔 이것이 말이 안 되는 얘기 같았지만 IVF, 인공수정, 남성의 임신 및 출산이 가능한 지금 시대에 임신과 출산은 더 이상 여성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부여하는 젠더 규범 역시 희미해지고 있는가? 할버스탐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데, “기술이 진전한다고 해도 양육에 부과된 이데올로기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37)는 점 때문이다. 즉 사라질 것 같은 이원 젠더 구분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37).
임신과 출산 기술의 발달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젠더 규범은 2000년대 이후 미국에서 방영된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The Switch, The Full Monty, Roger Dodger, Big Love, The Kids Are All Right와 같은 작품은 남성은 쓸모없는 존재거나 남성 파트너 없이 임신하고 출산하는 여성의 삶을 다루면서 ‘남성의 종식(終熄)’으로 해석될 여지를 제공했다. 이것은 ‘남성성의 위기’라고 불리는 시대, 후기산업사회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고용되는 시대에 징후와도 같았다. 몇몇 언론은 “남성의 종식”(46)이란 제목을 직접 사용했다. 하지만 이들 작품에서 레즈비언인 여성은 결국 남성과의 밀접한 관계로 마무리되거나, 레즈비언의 성애적 관계는 묘사되지 않고 이야기되지만 이성애 남성의 성애적 관계는 이야기되기보다 묘사된다(56). 남성 없는 임신과 양육이나 ‘대안적’ 가족 이야기에 레즈비언 관계는 여전히 부재한다.
뿐만 아니라 싱글맘가족, 여성가장가족 등 남성이 부재하는 현상은, 후기산업사회의 특화된 현상이 아니라 비백인 집단에겐 과거에도 만연한 현상이었다. 따라서 “남성의 종식”과 같은 언설은 백인만을 염두에 둔 언설이며, 비백인을 함께 고민한다면 전혀 다른 식으로 논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50).
그렇다면 가족구성에서, 양육 실천에서 다른 가능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할버스탐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예시한다. 부치-펨 관계는 젠더의 임의성 속에서, 가부장제와 강제적 이성애 없이 권위와 젠더 구분을 가르칠 수 있다(58). 그리하여 젠더를 존재가 아니라 행위로 이해하도록 할 수 있다(58). 뿐만 아니라 학부모 행사에서 부치의 행동은 다른 남성의 행동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59).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 역시 가족 관계에서도 다른 가능성을 원한다. 그럼에도 강제적 이성애는, 불완전하고 흠이 많은 이성애를 유일한 가능성, 유일한 젠더 역할, 규범적 양육 방식으로 인식하도록 할 뿐이다(61). 그러니 충분히 매력적인 다른 양육 실천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젠더를 다시 상상하기] 일부

지난 10월 17일, 언니네트워크에서 진행한 “[열린세미나] 덮은 책도 다시 보자”에 참여해 발표를 하였습니다. 짧은 원고도 제출했고요. 원고에도 적었듯 총 세 개의 절 중에서 가장 긴 분량인 2절은 <남성성과 젠더>에 실린 글을 수정했고, 새롭게 추가한 내용은 1절과 3절 뿐입니다. 그 중 아예 처음 얘기한다 싶은 글은 3절 뿐.
전문은 언제나 그렇듯 writing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니네트워크에서 제작한 별도의 편집판이 있지만 파일이 제게 없을 뿐만 아니라  제가 배포할 권한도 없어서, 제가 직접 편집한 판본으로 제 글만 올렸습니다. 뭐, 당연한 얘기기도 하고요.
 새롭게 추가한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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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7.수. 20:00-22:00 언니네트워크 열린세미나 @여성과 일 건물 지하1층 공간 ‘나비’
젠더를 다시 상상하기: 주민등록제도, 의료기술, 그리고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루인(트랜스젠더/퀴어 연구활동가,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운영위원, runtorui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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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제도는 개인을 일평생 지배 규범적 젠더에 적합한 존재로 규제하는 일상 장치다. 주민등록제도에서 살고 있는 한, 다른 말로 당신의 출생이 신고되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젠더화된 존재며 법적으로, 의료기술적으로 보증된 존재다. 주민등록제도는 이 사회의 적법한 젠더 구성원임을 보증하는 (의료)문서다. 만약 어떤 누군가가 주민등록 상의 젠더를 바꾸고자 한다면 인우보증서를 제출해야 한다. 인우보증서는 주변 사람이, ‘이 사람은 진짜 트랜스젠더다’라고 확인해주는 서류다. 그런데 인우보증서의 역할은 단순히 트랜스젠더의 존재 확인이 아니다. 젠더 변경을 요청하는 개인으로 인해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젠더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이원 젠더 질서, 젠더이원화된 관계는 인간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출생시 지정받은 젠더로 살며 맺은 젠더이원화된 관계에 혼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증할 때에만 신분 상의 젠더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요구하는 젠더 관계, 젠더 규범은 어떤 관계며 규범일까? 가급적 많은 사람의 젠더 보증서를 받아야 할 때 ‘우리’가 재현하고 수행할 수 있는 젠더는 어떤 모습일까? 트랜스젠더 개인의 어떤 욕망 및 행위와는 별개로 이런 구조적 상황에서 실천할 수 있는 젠더 규범, 젠더 관계는 특정한 방식에 제한된다. mtf라면 여성스러워야 하고 ftm이라면 남성스러워야 한다. 이것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적절한 젠더, 적법한 젠더를 표지하고 공표하는 것과 같다. 여성이라면 지배 규범적 여성성을 재현/수행해야 하고 남성이라면 지배 규범적 남성성을 재현/수행해야 한다. 트랜스젠더의 주민등록 상 젠더 변경 이슈엔 젠더 규제와 관리, 젠더 규범화와 균질화가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의 주민등록 이슈는 정확하게 페미니즘 이슈다. 여성성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어떤 여성성만을 규범적인 것으로, 적절하고 적법한 것으로 구성하는지를 문제 삼고 이런 구조에 개입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역사기도 하다면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 이슈는 필연적으로 페미니즘 이슈일 수밖에 없다. 트랜스젠더가 단지 사회적 소수자여서 페미니즘과 함께 할 수 있거나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트랜스젠더 이슈의 많은 것이 그 자체로 페미니즘 이슈기에 그냥 할 뿐이다.

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을 다시 생각하며

수업 시간에 쓴 쪽글입니다. 글을 제출한 날은 2012.10.10.인데 그날 저녁 벗들과 논평을 나눴고 그 중 일부를 반영하며 조금 수정한 판본입니다.
내용은 수업 자료를 충실하게 정리한 것 뿐입니다.
루인. “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을 다시 생각하며” Run To 루인. 2012.10.13. 웹. 201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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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을 다시 생각하며
-루인
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이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사회학과 인문학 등 현대 이론의 발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은 여성과 남성이 원래 다르고 그것은 생물학적 본질이기에 여성 억압은 당연하다는 지배 규범에 도전하고 상대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여자[female]와 남자[male]로 타고난다고 해서 여성성과 남성성 역시 타고날 이유는 없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것은 여성 억압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핵심 근거다. 그런데 섹스와 젠더를 구분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 섹스와 젠더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있는가? 섹스는 생물학적 본질, 젠더는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구분 공식은 적절한 것일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뜻인가?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이와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질문은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와 리키 윌킨스(Riki Wilchins)의 문제의식과 공명한다. 먼저 델피 식으로 묻는다면, 섹스와 젠더를 얘기할 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델피는 섹스와 젠더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섹스 혹은 젠더가 반드시 둘로 구분되고 존재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되묻는다. 인간이 두 종류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정당화되지도 증명되지도 않았지만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이를 그냥 단언한다(Delphy, 61). 아울러 인간의 몸엔 다양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유독 섹스(젠더)가 최우선 차이로 이해되어야 할 타당한 이유 역시 없다(Delphy, 61). 샌드라 하딩이 “강한 객관성”이란 개념으로 지적한 것처럼, 섹스는 정말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인지, 사람이 두 종류로만 태어나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지배 규범적 통념을 반복하고 재생산할 뿐이다. 이제 윌킨스 식으로 묻는다면, 반대의 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윌킨스는 반대 섹스가 존재하는가를 되물으며 섹스 혹은 인간 해부학이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되었음을 설명한다. 이 설명을 통해 윌킨스는 반대 섹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섹스를 이원론으로 이해하는 사유체계가 있음을 밝힌다. 현대사회에선 매우 자주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설명하는 심리학, 뇌과학 논문이 발표되고 이것이 ‘과학적 사실’로 포장된다. 하지만 이런 ‘발견’, 실험결과는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것인지 차이를 발명하고자 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생물학자 앤 포스터-스털링(Anne Fausto-Sterling)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 한 연구는 실패한 연구로 가정되고 그 결과는 버려진다고 지적한다(Wilchins, 86). 즉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차이를 원하기에 차이를 획득하는 것이다(Wilchins, 86). 이 과정에서 무수하게 많은 유사성은 누락된다. 이를 테면, 폐가 두 개라거나 심장이 하나라는 또 다른 ‘과학적 평균치’(‘과학적 사실’은 아니다)는 여성과 남성의 몸을 설명하는데 누락된다. 오직 섹스, 생식기관, 재생산 능력/방식만이 강조될 뿐이다. 델피와 윌킨스 모두가 지적하듯, 섹스 자체가 젠더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섹스로 수렴해서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방식은 결국 환원주의에 빠진다.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인간이 겪는 억압을 본질로 구성/형성하는 규범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그러면서 사회문화적 구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여성[woman]과 남성[man], 여자와 남자라는 이분법, 여자-여성, 남자-남성의 연결 고리를 자연적 필연으로 가정하면서 또 다른 본질주의를 재생산하였다. 본질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 이론이 바로 그 본질주의를 (재)생산한 것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질문하지 않는 순간 또 다른 폭력, 억압이 발생하고 지배 규범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델피는 “무지에 직면할 용기를 갖는 것은 상상력을 위한 전제조건”(57)이라고 지적했다. 섹스-젠더 이론이 또 다른 억압을 재생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억압과 차이의 생산 기제를 탐문하는 이론이라면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는 개념을 단념”(Delphy, 62)하고 전제 자체를 심문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세상을, 나 자신을 좀 더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