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관계맺기

가끔 블로그 유입 검색어를 확인하면 재밌는 검색어가 많습니다. 최근 제 블로그에 집중해서 들어오고 있는 검색어는 “정신분열증 고양이 사진”… 응? 이건 거의 하루 동안 87명이 들어왔는데 도대체 왜… ㅡ_ㅡ; 꾸준히 들어오는 검색어는 “감동적인말” 근데 전 이런 말 안 쓰는데요? 저와 전혀 상관없을 법한 검색어는 상당히 많은 분들이 찾고, 이 블로그의 핵심어인 트랜스젠더, 루인, 채식 같은 건 하루에 두어 건 정도입니다.

채식 관련 검색어 중 재밌는 건 “채식주의자는 무얼 먹어야”란 게 있습니다. 심심찮게 들어오는 검색어입니다. 근데 제가 할 말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냥 대충 아무 거나 드셔도 괜찮습니다… 랄까? ;; 이 검색어가 구체적으로 무얼 찾고자 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처음으로 채식을 시작하며 관련 정보를 찾는 거라면, 저는 하나 씩 줄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첫 석 달 정도는 돼지를 안 먹고, 그 다음엔 닭을 안 먹는 식으로.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안 먹는 것, 식습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겠다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으니까요. 채식 한 달 정도 하고 나서 너무 힘들어 관두고선,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나도 예전에…”란 후일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 생활로서 채식을 하기 위해서도 하나씩 바꿔나가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아요. 뭐, 급한가요? 🙂

저는 채식이 몸에 익어서일까요? 아님, 이젠 실수로라도 우유가 들어간 제품을 먹는다고 해서 개의치 않는 상황이라서 일까요? 이젠 음식선택으로 고민하는 경우는 적은 듯합니다. 대신 채식(나의 입장에선 비건vegan)을 하면서 가죽제품을 선물 받았다면 그건 사용하면 안 되는 걸까? 이런 부분이 늘 궁금합니다. 비건은 가죽제품도 사용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있죠. 하지만 채식이 고행이 아니라면, 상대방이 고심해서 고른 가죽제품 선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5년 전에 선물받은 지갑은 아무래도 가죽인 듯합니다. 그때도 나는 비건이었기에 가죽제품을 꽤나 망설였죠다. 그 전에 가죽제품을 사용하면 몸에 두드러기가 날 때도 있고 해서 더 망설였고요. 근데 정중하게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어요. 선물을 준 사람은 평소 감정표현을 잘 안 하고  늘 무뚝뚝했기에 그가 선물을 고르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그 가죽스러운 지갑은 인조가죽일 수도 있요어. 인조가죽도 썩 내키지 않지만요. 그럼에도 나는 그 지갑을 사용하기로 했고, 그렇게 5년 정도 지난 지금도 잘 쓰고 있습니다.

저는 늘 이런 순간이 고민입니다. 그래서 배수아의 소설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은 일종의 화두처럼 저를 따라다닙니다.

“혹은 내가 결코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건네는 따뜻한 한 그릇의 굴라쉬 수프에 주사위 모양의 고깃덩이가 들어 있을 때, 내가 채식주의자임을 그가 잊은 사실을 가볍게 지적하는 것이 수프 접시의 국물을 떠먹기 전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먹은 다음이어야 하는가.”

언제가 가장 좋을까요? 사실 한 입 떠먹고 나서 지적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습니다. 하지만 한 입 떠먹기 전에 지적하는 것도 크게 문제될 건 없죠. 결코 정성을 무시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매순간,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채식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의 행동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게 좋을까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답이 어딨겠어요. 🙂

채식과 채식주의는 반드시 일치해야 할까?

종종 채식을 채식주의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걸 알고 나면, “채식하세요?”라고 묻기보다는 “채식주의자세요?”라고 묻는다. “주의자ist”라는 무거운 접미사를 사용하는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주의ism란 부담스러운 접미사를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채식을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채식주의에 반드시 채식이라는 행위가 필요한 걸까? 채식을 해야만 채식주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채식을 하는 사람에게 “채식주의자세요?”라고 묻는 건, 채식을 하는 사람은 어떤 계기와 정치적 신념 같은 게 반드시 있다는 선입견 때문일 터. 여기서 선입견이란 말이 반드시 부정적인 늬앙스는 아니다. 그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채식이 소비되고 유통되는 어떤 방식이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일 뿐. 채식은 어떤 신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통념은 채식과 채식주의ism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 둘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있을까?

언젠가 이곳 [Run To 루인]에서 “육식하는 채식주의자vegan”란 상상력으로 채식을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했을 때(http://goo.gl/amhT 심심하면 http://goo.gl/q2zP 도;; ), 나는 동물과 식물이란 구분 자체를 문제제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려 3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이와 관련해서 고민을 더 진전한 건 아니다. 채식은 내게 그냥 습관일 뿐, 채식이 매우 분명한 정치학으로 내 삶에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나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곤 한다. 적어도 혼자 다닐 때,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냥 안 먹는 게 많은 사람일 뿐이다. 농반진반으로 나는 편식주의자일 뿐이라고, 정치적으로 편식한다고 말하면서. 하하.

그렇다고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라는 구절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니다. 고민하지 않을 뿐, 이것은 나의 몇 가지 화두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 다시 든 고민은, 채식과 채식주의가 반드시 일치해야 할까? 그러니까 요즘 들어 나의 고민은 채식이라는 어떤 행위와 채식주의라는 어떤 인식론을 구분할 수 있다면(한시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채식을 하지 않는다고 채식주의자로 자처하지 못 할 이유는 뭔가?’다. 이런 고민은 몇 해 전에 읽은 한 선생님의 글이 떠오르면서 촉발했다. 중산층인 대학 교수는 맑스주의자일 수 있는데, 페미니즘/페미니스트는 여성이라는 특정 젠더로 제한하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적인(혹은 논쟁적인) 인식이라고 지적한 글이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당사자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어떤 운동은 소위 말하는 ‘당사자’만 할 수 있는가? ‘당사자’는 정말 자신의 ‘경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걸까?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운동은 트랜스젠더만 해야 하는 걸까? 트랜스젠더는 정말 트랜스젠더 운동을 가장 잘 할 수 있고, 트랜스젠더 이론을 만드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할까? 당사자 정체성이라는 것이 분명 의미있는 역할을 하지만, 앞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당사자와 비당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고민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예 당사자주의에 바탕을 두고 질문하면,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의료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사자 앞에서 나는 당사자이기 힘들고, 트랜스젠더는 당연히 이성애자며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당사자 앞에서 나는 곤란한 당사자거나 당사자이기 힘들다. 이럴 때 누가 당사자일까? 간단하게 말해 어떤 경험이나 (정체성)범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다시 채식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채식주의자일 필요는 없고, 채식주의자가 반드시 채식을 할 필요도 없다고 믿는다. 물론 이 말이 성립하기 위해선 채식과 육식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어디서부터는 채식이고 어디서부턴 육식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만(http://goo.gl/q2zP). ;;; 채식과 채식주의를 구분하려는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의 현재 상황 때문이다. 나는 과거엔 어떤 이유에서 채식을 했지만, 지금은 그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가 현재로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서, 현재의 내겐 채식을 시작한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아울러 나는 내가 채식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대충 먹는 사람이라고 말하길 더 선호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 나는 채식주의자에 해당한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범주와 다른 사람들이 내게 붙여주는 범주 사이에서(물론 타인이 붙여주는 범주를 내가 사용할 때도 적지 않지만;; ) 갈등하며, 새롭게 든 고민은 ‘채식 혹은 채식주의가 당사자주의일 필요가 있을까?’다. 그래서 채식과 채식주의라는 구분을 설명하는데,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란 표현이 다시 한번 유용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채식주의라고 불리는 어떤 인식론, 세계관은 뭘까? 글쎄.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다. 비건인 사람도, 육식을 하는 사람도 모두들 자신을 채식주의자라고 설명하면서 서로 열심히 논쟁하다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흐흐.

채식의 오랜 습관: 언어바꾸기

“** 좋아하세요?”
“** 좋아하세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제대로 말해야 할 텐데…. 걱정이었다. 항상 중요한 순간에 말이 꼬여 엉뚱한 말을 한다는 걸 알기에 몇 십 번을 연습했다.
“** 좋아하세요?”
매우 조심스러운 상황이라 말을 가려야 했다. 그러니 긴장에 또 긴장!
그 말을 해야 하는 순간까지 긴장하며 입에서 중얼중얼. ‘** 좋아하세요?’ 그리고 이제 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상황은 대체로 무난하게 넘어갔다. 별 일 없었고.

玄牝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현 듯 깨달았다. “** 좋아하세요?”라고 물어야 하는데 “** 드세요?”라고 물었다는 것을. 아하하.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저 나의 채식 경험이 나의 말버릇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어 좀 웃겼다. 어떤 사람들에겐 특정 음식을 좋아하는 것과 먹는 것이 동일한 경험이겠지만, 내겐 그렇지 않다. 일례로 내 음식의 향수는 라면이지만, 난 라면을 먹지 않는다. 농담처럼 내가 채식을 관둔다면 라면 때문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라면 특유의 인스턴트와 조미료 맛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좋아한들 무슨 소용이랴. 나는 라면을 먹지 않고, 내가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없는데.

아무리 연습해도 소용없다. 좋아하는지 보다 먹는지가 내게 더 중요한 이슈다. 십 몇 년을 이 이슈에 부딪히며 살다보니 이젠 몸에 익었다. 그래서 긴장하는 순간, 말을 하기 전까지 연습한 말이 아니라 몸에 익은 말이 튀어나온다. 긴장하면 그냥 알아서 몸에 익은 말이 나온다. 채식은 나의 언어 습관도 바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