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學文盲. 무학문맹

無學文盲. 무학문맹.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사이트(http://bit.ly/36yLNT)에 따르면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지 못함.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학(有學)은 “불교의 진리를 인식하였으나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하여 항상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닦는 성문(聲聞).” 즉, 유학은 아직도 배울 것이 있는 상태란 뜻이다. 그렇다면 무학문맹은 이제는 배울 것이 없어 자구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건지도 모른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는 어느 선사의 말처럼.

나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선, 문자를 읽지 않고선 세상과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책을 읽는다. 나는 책을 읽어야 간신히 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책이 없으면, 문자에, 자구에 얽매이지 않으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종족. 언제나 문자에 갇혀, 문자 이상을 이해할 수 없는 무지의 꼭대기에 머무는 종족. 책을 읽지 않으면 불안해서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다니며 책 속으로 숨어드는 갯강구. 재빠르게 문자 속으로 숨었다가 인기척이 사라지면 더듬이로 눈치를 살피며 바깥으로 나와 우쭐거린다.

책은 내가 얻은 가장 완벽한 보호막인지도 모른다. 나와 당신의 거리를 더 이상 좁힐 수 없도록 하는 완벽한 벽이기도 하다.

겨울이 왔다. 피아노 소리가 사랑스러운 겨울이 왔다. 책 속으로 숨어들어, 더듬이를 잘라 버리고 지내도 괜찮은 겨울이 왔다.

책 처분을 고민하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이 입을 열고 나를 삼킨다. 일은 나를 씹어 삼키고 적당히 소화해선 배설한다. 그렇게 일에서 빠져 나온 나는 곧 다른 일에 먹힌다. 일테면 요즘 나는 매일 일정 세 개는 기본이고 일정이 너댓 개는 그냥 좀 바쁜 정도인 나날이다. 바쁜 게 문제가 아니다. 블로깅을 할 수 없어 아쉬운 게 문제다. 글을 쓸 수 없어 아쉽다. 글을 읽을 시간은 있어 다행이다!

이런 와중에, 이렇게까지 책을 사 모아서 뭐하나 싶었다. 이걸 다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고, 어떤 책은 평생 다시 안 읽을 건데 …. 책을 처분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고민 중인 처분 경로는 세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헌책방에 팔거나 그냥 넘기는 것. 판다면 적은 금액이나마 생활비에 보탬이 되겠지만 숨책이라면 그냥 넘기고 싶다. 워낙 고마운 곳이라서. 두 번째는 이곳 [Run To 루인]에서 착불로 무상배분하는 것. 세 번째는 아카이브에 기증하는 것. 세 가지 경로를 고민하는 건 책의 성격에 따라 처분할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여성학이나 섹슈얼리티/성, 퀴어 관련 기록을 꾸준히 모았다. 근데 그 중엔 개인소장보단 공공 아카이브에서 소장하는 게 더 나은 경우가 있다. 일례로 내겐 데니스 로드맨이 쓴 두 종류의 자서전이 있다. 하나는 한글로 옮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문이다. 그가 게이인지 크로스드레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자서전엔 퀴어와 관련해서 읽을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더구나 한글로 옮긴 책은 현재 절판. 몇몇 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한국의 대학도서관이 폐쇄적인 건 유명하니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아니,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주제아카이브에서 소장하지 않는 한 기록이 사장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반드시 소장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른 예로, 『역사의 사기꾼들』이란 책은 의료과학기술에서 발생한 오류를 다루는데, 비이성애, 트랜스젠더, 간성과 관련 있는 내용이 조금씩 있다. 퀴어나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춘 책뿐만 아니라 조금씩 언급한 책도 여럿 모은 결과다. 근데 굳이 이 책을 내가 소장할 필요가 있을까?

책을 소장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어떤 기록을 필요로 할 때, 그 기록에 신속하게 접근가기 위해서다. 도서관이 있다지만 도서관개관시간은 때때로 기록에 접근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이 너무 불편해서 관련 기록들을 모두 모았다. 근데 모으다보니 소장해서 나쁠 건 없지만 굳이 내가 소장할 필요가 없는 기록들도 많더라. 어떤 기록은 독점하기보다는 공개하는 게 장기적으로 내게 도움이겠더라. 그 기록을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혼자 즐겁겠지만 충분히 활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미래는 모른다지만 내가 데니스 로드맨 자서전으로 글을 쓸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잠깐 언급하는 일은 있어도 그의 자서전을 분석할 일은 없을 터. 하지만 그 기록을 자료로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록을 공개하는 게 결국 내게도 도움이다. ‘나 자료 이 만큼 있다’는 자족감은 공허할 뿐이더라.

다른 한 편, 몇몇 소설들은 아마 평생 다시 안 읽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과연 『일식』을, 『애니멀 크래커스』를 다시 읽을 일이 있을까? 혹은 『핫뮤직』 과월호를 굳이 내가 소장한다고 해서 다시 읽을 일이 있을까? 차라리 그 책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유통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방식이 어떤 형태건 간에 유통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더 이상 책을 둘 자리가 없어 이사를 고민해야 한다면 더욱더!

이렇게 작심했을 때 얼른 처분하면 좋겠지만, 나의 진로가 불투명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긴 하다. 흐흐. ㅡ_ㅡ;; 진로에 따라 소장할 필요가 있는 책과 유통해도 무방한 책이 나뉘기 마련이니까. 더 큰 문제는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지 않는 이상, 선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렇게 쓰면 책이 상당히 많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단행본만 얼추 사천 권도 안 된다. 책 자체가 많은 건 아닌데 방이 8평도 안 돼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다;;;;;;;;;;;;;;;;;;;;;;;;;;;;;;;;;

내년 초까지 2/3 수준으로 줄이는 걸 목표로 하자!

+
사실 더 줄이고 싶고 굳이 소장하지 않아도 좋을 자료들이 더 있긴 하다. 처분 방법이 고민이라 망설이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확 줄여야지.

근황: 주절주절

01
너부리 님의 표현을 빌리면, “매주 가장 바쁜 주를 갱신하며 산다.” 일이 많았던 건 아닌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들이라 조금 분주했다. 5월부터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번 주가 끝나면 좀 여유가 있을 듯. 5월부터 시작해서 이번 주가 고점을 찍을 거 같다. 그러고 나면 공포의 10월, 11월까진 여유가 있을 듯하다. 이 두 달 동안 학회 업무 인수인계, 학회 추계학술대회 준비 및 진행, 글 두세 편, 지렁이 협력사업 보고서 작성, 가을부터 시작할 어떤 프로젝트 글쓰기,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정리 등등을 해야 한다. 덜덜덜.

02
지난 달 다이어리를 정리하다, 영어 논문, 한글 논문과 같은 글을 제외하고 단행본만 18권을 읽었단 걸 깨달았다. 살짝 당황했다. 악착같이 읽었구나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책을 읽는 리듬을 되찾은 것뿐이다. 독서에도 흐름이 있고, 리듬이 있다.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리는데, 2월부터 애쓴 결과다. 소설을 중심으로 인문사회학 관련 책들을 중심으로 읽고 있다. 물론 책과 논문은 도피 수단으로도 최고다.

03
헌책방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사는 책도 많다. 지지난 주엔 주인장들(난 사장이란 표현보다 주인장이란 표현이 정감 있어 좋아한다, 이 표현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어 좀 그렇긴 해도;;)이 책을 그만 사라고, 하루에 한 권 이상 안 팔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만날 ‘오늘은 책을 안 살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끌리는 책을 만나면 어찌할 수가 없다. 다짐을 단단하게 해서일까, 지난주엔 많이 줄였다. 이번 주엔 한 권도 사지 않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과연?

04
책방에서 일하며 좋은 건, 책을 읽건 글을 읽건 무언가를 읽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거다. 인터넷도 할 수 없고, 후치와 놀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읽는 것뿐이다. 바쁠 땐 그 시간이 아쉽지만 그래도 이렇게 충전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하루의 긴장을, 일을 하며 푼다.

05
나의 생활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따지니 참 기묘했다.

현재 비정규직으로 하고 있는 일은 두 개다. 학회 일과 책방 알바. 학회 일은 11월로 끝나고 책방 알바는 정확한 기약은 없어도 언젠가 끝난다. 근데 비정규직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나의 정규직은 활동과 공부/학생인데 이 둘은 생계와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과 농담으로 자주 하는 얘기인데, 활동만큼 확실한 정규직도 없다. 자신이 원한다면 평생 할 수 있는 직종이다. 사 소 한 문제라면 생계엔 도움이 안 된다는 것. -_-;; 하지만 일 자체가 즐거우니(혹은 괴로우니) 괜찮다. 학생/공부란 일도 내겐 일종의 정규직이다. 가끔 생활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가끔이다.

06
생활비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지만, 웃기게도 최근 하루에 한 끼를 간신히 먹는 상황이다. 바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_-;; 카페에서 일하는 날이면 그나마 두 끼를 챙겨 먹을 수 있는데 학교에서 일하는 날이면 그냥 저녁에 한 끼만 먹는다. 학교에 들어가면 밖에 나가는 게 귀찮아서 그냥 버티는 거다. ;;; 돈이 굳어서 좋긴 한데 몸이 위태롭다.

07
피곤해서인지 제대로 안 먹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두통이 잦다. “뒷목 잡고 쓰러진다”고 할 때의 뒷목에서 통증을 느낀다. 탁, 탁, 때리는 듯한, 튀는 것 같은 통증이다. 편두통이 도지면 뒷목이 아팠지만, 이번엔 새로운 유형이다. 오오, 신기하다. +_+

08
자막 작업을 했지만, 정작 영화제 기간 동안은 극장에 안 들어갔다. 자막에만 신경 쓸 거 같아서. 일테면 ‘아, 저기선 1초 정도 시간을 더 줘서, 사람들이 읽기 편하게 해야 했는데’라거나, ‘저기선 0.5초 정도 자막이 늦게 나왔어야 더 좋았을 텐데’라거나, ‘저 자막은 저렇게 말고 좀 다르게 끊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고민만 할 거 같아서. 흐흐

영화제 자막은 한 줄에 11자, 한 번에 총 두 줄이 등장할 수 있다. 영화제에 간 적이 있다면 아실 듯. 그래서 한 번에 띄어쓰기 포함 최대 22자를 출력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글자를 어디서 끊는 게 좋을까로 고민한다. 글자의 개수로 끊어야 사람들이 읽기 편할지, 단어를 단위로 끊어야 사람들이 읽기 편할지와 같은 고민이다.

“난 단지 내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란 문장을 예로 들자. 이 문장을 끊어주지 않으면 자막 화면에 나오는 글자는 “난 단지 내 삶을 살고 싶”까지는 완전하게 나오고 “을”은 윗부분에서 잘린다. 그럼 “싶”과 “을” 사이에서 끊는 게 좋을까, “살고”와 “싶을” 사이에서 끊는 게 좋을까와 같은 고민을 하는 거다. 흐흐. 이 문장을 한 줄로 출력하고 싶으면 “난 단지 내 삶을 살고 싶다”로 수정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다”가 잘려 나온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 하나는 결국 두 줄로 출력하는 것. 다른 하나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다시 한 번 글자의 개수를 줄여 “난 내 삶을 살고 싶다” 혹은 “단지 내 삶을 살고 싶다”, “내 삶을 살고 싶을 뿐”과 같은 방식으로 바꾸는 것. 자수를 줄일 때 부담스러운 건 뉘앙스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 영화관에 가면 자막 기술에 더 신경 쓸 거 같다. 내년에도 자막 작업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더 잘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