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연대기, 트랜스젠더퀴어 연대기 공개

트랜스연대기를 공유합니다. 하지만 지금 공개하는 판본은 당장 지금 가진 것의 1/10도 안 되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입니다.

2016.08.18. 저녁에 KSCRC퀴어아카데미에서 “트랜스젠더퀴어 연대기: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란 강의를 합니다. 이 강의를 위해 1921년부터 2016년까지 트랜스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는 신문기사 같은 출판물, 각종 사건 등을 정리했습니다. 당연히 정말 많은 것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물론 업데이트는 제가 삘 받을 때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시로 조금씩 바뀌어 있을 지도 모르고요.
연대기를 볼 수 있는 곳은 상단 메뉴에 “트랜스연대기”로 나와 있습니다. [Run To 루인]이란 블로그 타이틀 아래 있고요.
참고로 미국 및 유럽 연대기는 스트라이커와 메예로비츠를 참조했기에 미국 중심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크게 업데이트가 안 될 예정입니다. 그저 참조삼으시라고 적어뒀을 뿐. 향후 업데이트는 한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지금은 제목 등 간단하게만 적혀 있지만… 제 역사연구 프로젝트가 1차로 끝나 논문이 끝나면 그때 상세 서지사항이 모두 적혀 있는 판본으로 대거 업그레이드할 예정이고요.
그럼 심심할 때 한 번 보시길~

동성애규범성

스트라이커 강의를 하며 동성애규범성을 중요한 한 축으로 설명했다.

동성애규범성이란 용어는 많은 퀴어연구자가 리사 두건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스트라이커가 2008년에 쓴 글에서 리사 두건 이전부터 이 용어와 개념이 쓰였음을 지적했다. 유사한 개념어로는 주디스 할버스탐(여자의 남성성 저자)이 젠더규범성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트랜스 공동체에선 1990년대 초반부터 동성애규범성을 지적했다고 했다.
스트라이커는 이런 역사적 흐름과 함께 퀴어 학제에서 트랜스 연구자와 활동가의 연구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트랜스의 역사와 이론, 연구를 배제하면서 동성애 중심으로 퀴어 학제를 구성하는 방식을 동성애규범성의 하나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즉 비이성애-비동성애 논의는 배제하거나 덜 중요한 것, 중요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면서 퀴어 학제 내에서 지식의 위계를 만들고, 이런 규범성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배제하거나 누락하고 동성애 중심의 지식과 역사에 더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를 동성애규범성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한 강의에서 동성애규범성을 리사 두건의 개념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을 들었다. 그 순간 자체가 하나의 동성애규범성이 작동하는 순간이었다. 리사 두건이 동성애규범성을 주창한 최초의 연구자도, 동성애규범성을 설명한 첫 연구자가 아님에도 마치 동성애규범성을 리사 두건의 것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동성애규범성이다.
좀 많이 화가 났다.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

작년 언제부터인가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와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혼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트랜스젠더퀴어로 일괄적으로 쓰고 있다. 아직 입에는 잘 안 붙어서 트랜스젠더라고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거의 10년을 트랜스젠더라고만 말해왔으니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단독으로 쓰는 글에선 어지간하면 트랜스젠더퀴어로 쓰고 있다.

사실 트랜스젠더퀴어는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용어다.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붙인 용어라고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정확한 의도를 설명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나는 특별히 의도를 쓰지 않고 LGBT/퀴어란 용어를 그냥 쓰는 등 이런 일이 많으니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어쩐지 트랜스젠더퀴어와 관련해선 몇 번 질문을 받아 정리를 해야 할 듯했다.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쓰기로 한 첫 번째 이유는 나 자신이 트랜스젠더퀴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 동안 나를 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하며 지내왔고 이를 통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저항하는 젠더 인식론을 구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내가 말하는 트랜스젠더는 또한 젠더퀴어기도 하다. 아울러 나 자신이 트랜스젠더면서 젠더퀴어기도 한데 내겐 이것을 분리해서 설명하는 일이 매우 불편했다. 트랜스젠더’면서’ 젠더퀴어가 아니라 그냥 트랜스젠더퀴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인적 이유에서만 이 용어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란 용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고, 쓰이는 방식을 살피다 보면 이 두 범주를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장면을 포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현재 시점에서의 트랜스젠더, 혹은 의료적 조치를 하고 자신을 (트랜스)여성 아니면 (트랜스)남성으로 설명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가입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이런 식의 설명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말하는 이들이 적잖게 있었다. 아울러 자신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설명하는 이들 역시 특정 순간엔 이런 식으로만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한다고 해서 남성으로 살아야 했던 과거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런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한편 젠더퀴어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호르몬만 하건, 수술을 하건 의료적 조치를 원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있었다. 아울러 의료적 조치를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어떤 순간엔 구분하는 듯하지만 젠더퀴어의 복잡한 경험 맥락에서 어디서 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또는 나 자신은 이런 구분과 분열, 모순을 어떻게 하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부연설명을 해야 하는 고단함을 겪지 않으면서, 그 분열과 모순을 내 삶이자 내 몸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란 고민을 했다. 그것이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한 이유였다. 즉 의료적 조치를 하건 하지 않건, 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만 가끔 틈새를 드러내건 이원젠더 규범에 저항하며 다른 방식으로 젠더를 구성하건 상관없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고 저항하고 때때로 능청스럽게 무시하는 그런 일시적이거나 지속적 삶의 태도, 젠더 경험, 인식론을 설명하고 싶어서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채택했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강한 우려가 더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발표한 염려기도 하다.)
1990년대부터 대략 2000년대 어느 순간까지 용어의 대립(‘대립’이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은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젠더였다. 트랜스섹슈얼은 의료적 조치를 한 사람이고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와 상관없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젠더를 표현하는 사람을 포괄했다(학제 기준으로는 지금도 이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즉 지금 시점에서는 젠더퀴어가 당시엔 트랜스젠더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하거나 원하고, 전형적 여성성이나 남성성에 부합하거나 부합하려 애쓰고, 신자유주의 경제에서 스스로를 생산성 있거나 상품성있는 몸으로 재현/구현하고자 하는 사람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젠더퀴어는 바로 그런 정치학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이미 1990년대부터 사용한 개념/용어지만) 마치 새로운 것처럼 등장했다. 즉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 구도가 트랜스젠더-젠더퀴어로 바뀐 느낌이다. 나의 염려는 단순했다. 젠더퀴어가 또 다시 범주를 구분하고 범주를 확정하는 용어가 되지 않기를, 트랜스젠더란 용어가 쓰이는 방식처럼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염려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바람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용어가 지금의 젠더퀴어를 대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금의 정치적 인식론을 고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선택한 용어가 트랜스젠더퀴어다.
그러니까 이성애-이원젠더 체제에 저항하고 비판하고 농담처럼 무시하는 그런 인식론적 태도를 지속할 수 있길 바라는 어떤 입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