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계약 완료: 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 역사

며칠 전, 드디어!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의 트랜스/젠더/퀴어 입문서인 <트랜스젠더 역사>Transgender History의 번역을 계약했습니다. 출판사는 이매진이고요. 지난 4월에 번역제안서를 보냈고 그때부터 긍정적으로 얘기가 오갔으니 정식 계약까지 6개월이 걸렸네요. 하지만 번역하겠다고 얘기한 시점부터는 얼추 2년이네요.

작년 초인가, 제작년 말인가 장애-퀴어 세미나에서 제이(인터섹스 활동가 셰릴 체이즈의 인터뷰 논문을 번역한 분) 님이 스트라이커 책 발제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정말 좋다는데 제이 님을 비롯한 다른 세미나 구성원이 모두 동의하여 본격 번역하기로 했죠. 이 과정에서 제이 님이 초벌, 제가 재벌을 담당했고요. 이유는 제이 님이 번역을 정말 잘 하기고 하고요, 제가 번역을 정말 못 하기도 해서입니다. 일단 제이 님은 당일치기로 번역을 해도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번역합니다. 헷갈리는 문장 거의 없고, 꽤나 수월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제 영어 번역본을 읽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지만, 제 영어번역본은 읽을 수 없는 글입니다. 제 한국어 문장보다 조금 더 심하달까요.. 아니, 이렇게 설명하면 부족하고, 제가 영어를 번역하면 그 문장을 읽을 수가 없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 제이 님과 제가 책을 반으로 나눠서 번역한다면, 저는 수월하게 2차 작업을 하겠지만 제이 님은 그냥 처음부터 새로 작업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아하하. 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그냥 처음부터 제이 님이 1차, 제가 2차를 담당했지요.
그리고 1차 번역본을 작년 중순에 받았습니다만.. 제가 게을러, 지지부진하게 작업을 진행하다가, 그러다보니 늦어져서 결국 올 초에야 출판사와 얘기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요. 그리고 이런 저런 일정을 조율하다가 결국 최근 번역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니 내년 상반기엔 나오겠지요.. 네, 나와야지요.. ;ㅅ;
사실 출판을 염두에 둔 번역을 작정했을 때 여러 번 이곳에 떠들고 싶었지만(제가 인간이 가볍고 경박하여 막 아무 거나 떠들잖아요.. 하하. ;ㅅ; ) 자중하였습니다. 아무래도 계약이 되기 전엔 말하는 게 아니다 싶어서지요. 만약 작년에 떠들었다면 꽤나 민망할 뻔 했고요.
앞으로 또 다른 책을 번역한다면 그때도 공동번역이겠지만(단독으로 번역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 어느 쪽이건 첫 번째 책이 수잔 스트라이커라서 기뻐요! 헤헤헤.

잡담: 이매진 번역, 수잔 스트라이커

어쩌다보니 이매진에서 나온 번역서 두 권을 연달아 읽고 있다. 둘 다 번역이 괜찮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꽤나 번역 잘 한 문장이다. 그런데.. 뭔가 미묘하게 번역이 비슷한 느낌이다. 옮긴이는 당연히 다르다. 편집자를 확인했다. 각 책마다 세 명의 편집자가 담당했는데 그 중 두 명이 겹친다. 아하.. 이것이 편집자의 힘인가.. 읽기 수월한 번역서를 만들기 쉽지 않은데 이렇게 작업하다니 대단하다 싶다.
수잔 스트라이커의 <트랜스젠더 역사>를 어떤 연유로 다시 읽었다. 그 중…
공동체의 이름이 “퀴어”보다 “LGBT”로의 변화는 미국에서 성적 정체성 그리고 젠더 정체성 정치의 사회적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이 시작하고 있음을 표지했다.그것은 지배문화의 동일한 억압 구조에 대항하는 다른 집단에 의한 것이 아닌,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함이라는 자유주의적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더욱 급진적 개념의 연합, 저항, 그리고 도전에서 후퇴를 의미했고 때로는 트랜스젠더를 포함하는 시늉을 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몸짓을 취함에 지나지 않았다.
번역이 매끄럽진 않은데.. 이런 날선 비평이 좋다. 곱씹을 부분이기도 하다.

미국 트랜스젠더 역사의 단편, 한국 트랜스젠더 역사 쓰기 욕심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베이비붐 세대인 몇몇 트랜스젠더는 그들 세대의 많은 다른 일원처럼 동성애 해방 운동, 급진적 페미니즘, 신좌파 정치에 이끌렸으나 그곳에서의 환영은 단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1972년 샌프란시스코의 첫 번째 동성애자 자부심 행진(스톤월 항쟁과 더불어 컴튼스 카페테리아 항쟁을 기념했고 드랙의 참여를 환영했던)은 게이 남성 주최자 중  하나였던 리버렌드 레이먼드 브로쉐어스가 행진의 “비폭력” 정책을 위반하며 “음경을 잘라라!”라고 쓴 피켓을 계속해서 들고 있었던 한 레즈비언 분리주의자 대표단을 주먹으로 쳤을 때 주먹다짐으로 변질되었다. 행진 후의 집회에서 페미니스트와 몇몇 게이 남성 지지자는 그 싸움을 전형적 젠더 역할과 가부장적 여성 억압이 예시로 말하며 맹렬히 비난했고, 다시는 결코 브로쉐어스가 조직하거나 여성을 “조롱하는” 드랙퀸의 참여를 허용하는 동성애자 행진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73년에 두 개로 나뉜 샌프란시스코 자부심 행사가 조직되었다. 하나는 브로쉐어스가 조직했고 다른 하나는 드랙에 반대하고 트랜스젠더의 참여를 명백히 금지하는 게이와 레즈비언이 조직했다. 반anti드랙 행사가 현재 샌프란시스코 LGBT 자부심 기념 행사의 전신이 되는 동안 브로쉐어스는 그 이후 다른 동성애자 자부심 행사를 조직하지 않았다. 같은 해, 대륙을 가로질러 뉴욕에서는 스톤월 항쟁 참여자이자 STAR의 창립자인 실비아 리베라가 크리스토퍼 거리 해방의 연례 기념 행상에서 발언하는 것을 강제로 제지당했다.(Stryker 2008, 101-102)

-자부심 행진에 트랜스젠더 참여를 둘러싼 논쟁은 1990년대 초 다시 한 번 발생합니다. 반대와 찬성이 격렬했다죠. 이 논쟁의 가장 큰 폐해(제 판단입니다!)는 GLBT 운동을 게이가 가장 먼저 시작하고 그 다음 레즈비언이 참여하고 바이가 추가되고 마지막으로 트랜스젠더가 등장 및 운동에 참여했다는 인식을 만들었다는 거죠. 그래서 순서대로 GLBT라는 거죠. 농담 같죠? 미국에서 진짜 이렇게 믿고 있는 게이 활동가가 있더라고요. 그는 자기 주변에선 다 이렇게 알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ㅡ_ㅡ; 물론 몇 년 전 이야기인데 지금은 어떨까요?
-크리스토퍼 거리 해방 관련 행사는 바로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실비아 리베라는 스톤월 항쟁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하지만 스톤월 항쟁은 백인 게이 남성 중심의 역사로 전유되고 트랜스젠더의 발언권은 제지당합니다(리베라가 비백인이란 점도 작용했겠죠?).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 역사입니다. 한국은 운동 맥락이 너무 달라요. 물론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와 거부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국의 퀴어는 여전히 동성애 중심이고 바이와 트랜스젠더는 누락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누락에도 위계가 있어 트랜스젠더는 그나마 덜 누락되고 바이는 더 누락됩니다. ㅡ_ㅡ;;; ‘재밌게도’ 가끔은 LGBT라고 말하는데 그 내용은 온전히 동성애 혹은 게이나 레즈비언만 지칭할 때도 있다지요. 흐. 그럼에도 미국과는 맥락과 수위가 다른 듯합니다. 사실, 미국과 한국의 맥락이 다르다고 단언해도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제 경험에 불과하니까요. 알고보면 제가 함께 활동하는 단체, 활동가가 예외고 제가 겪은 적 없는 곳에선 상당한 혐오와 배제가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나중에 “한국 트랜스젠더 역사”란 책을 쓴다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아,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간 한국의 트랜스젠더 역사를 책으로 쓸 욕심은 있습니다. 논문 “캠프 트랜스”는 그 일부고요. 여건만 된다면 당장 쓸 수 있는 논문 주제도 최소한 두 개 이상 있지만 박사학위논문 이후로 미루고 있죠. 급한 건 아니니까요. 역사를 정리한 단행본은 적어도 10년은 더 지난 다음의 일정입니다. 크크. ;;;
그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죠. 이왕이면 그때까지 이 블로그도 남아 있길 바랍니다. 제가 혹은 루인이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이 블로그도 남아 있겠지만요. 🙂 그나저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정말 “한국 트랜스젠더 역사”란 책이 나온다면 지금 쓰고 있는 이 포스팅은 성지가 되는 건가요? 크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