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사회 집담회, 이후+법으로서의 젠더/섹슈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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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하면서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어느 날 어느 자리에 갔는데, 루인이라고 소개를 하자, [Run To 루인]의 그 루인이냐며 루인 블로그를 아는 사람을 만나는. 그럴 때면 어떨까 하는 상상.

그래서 지난 서울여성영화제 때의 일은 기쁘고 설레는 일이었죠. 키드님과 벨로님 그리고 아옹님, 세 분을 (루인의 입장에서) 만나진 못했지만 그렇게 어느 순간에 서로를 지나쳤고 그것을 글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건, 두근거리는 일이에요. 지금, 댓글과 블로그를 통해 만나는 분들을 만약 다른 방식으로 만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면 설레고요.

근데 어제 집담회에서 정말 이런 일이 생겼어요! [여/성이론]에 쓴 글을 읽고 블로그를 찾아 읽곤 한다는 말에, 한편으론 수줍었지만, 기쁘고 반가웠죠. 상상만 했지, 설마 일어날까, 반문했으니까요. 반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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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바람이 있었기에, 허전함이 몸 한 켠을 채우곤 했지만, 그래도 기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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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얼마나 올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많아서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토론도 의외로 활발하고 재밌었다. 주제 자체가 경우에 따라선 누구도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할 수도 있는 주제였고 ㅎㅁㅈ의 발제문과 달리, 루인의 발제문은 토론에 그다지 좋은 발제문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이 많은 얘기를 했다. 좋은 얘기들, 신나게 말 할 수 있는 그런 얘기들.

그런 와중에 가장 피하고 싶었지만 항상 직면하는 질문이 있었다. 만약 특별법을 제정한다면 요건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 법제정, 입법화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 편, 법이 필요한 지점들이 있기도 한데, 그렇다면 호적정정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요건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고민들. 법제정이 일종의 협상과정이라면 어느 지점에서 협상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법이란 애초 불가능하다면(어떤 의미에선 루인에게도 불리한 법인데) 어디서 어떻게 “합의”하고 조율할 것인가. 이런 고민 속에서 조금은 외면하고 싶은 부분이었기에, 질문을 받았을 때, ㅎㅁㅈ과 루인은 서로에게 먼저 대답하라고 미루기도 했다.

그런데,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라는 가정을 그대로 둔다면, 현재의 법체계와 제도를 둔 상태에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가정엔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협상할 수 있을까? 영국처럼 GID 판정만으로 성별을 변경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까? 아니면 지금과 같은 방식을 유지해야 할까? 어느 쪽도 불만스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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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발제문. 몇 시간 만에 거의 날림으로 쓴 글.

주최: 법과사회 대학원생 모임 집담회
장소: 서강대학교 다산관 603호
일시: 2007.04.21.19시
주제: 젠더/섹슈얼리티의 입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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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서의 젠더/섹슈얼리티
루인(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runtoruin@gmail.com)

※이 글은 “성전환자 성별변경을 둘러싼 법적 논의들”(이대대학원신문 제55호, 2007.03.12.)을 토대로 대폭 수정한 글입니다.

우선 전에 방송에서 듣기에 성전환을 하시는 분들의 경우 때로는 주미등록증을 바꾸어서 들고다닌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지 알고싶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현행법상으로는 그러한 행위는 공문서위조로 처벌받는데, 이러한 경우까지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고 싶거든요.
-한 법대 학부생이 메일로 보낸 질문에서

2006년 6월 22일 대법원은, 대법원 판례로는 처음으로 성전환자의 호적정정 신청을 허가하는 판결을 했다. 이 판결이 있은 지 넉 달 정도 지나, 근 1년에 걸쳐 준비한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을 10월 12일 발의했고, 현재는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이 특별법은 모든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호적상의 성별 변경 및 개명을 원하는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즉, 이 법안이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트랜스젠더들이 겪고 있는 여러 경험들 중 일부인 호적정정과 개명, 그리고 이와 관련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다.

특별법이 요구하는 성별변경의 요건은 “1. 의료법 제2조에 정한 의사 2인 이상(정신과의사 1인을 포함)의 소견서, 2. 생식능력이 없을 것, 3. 혼인관계에 있지 않을 것,” 이렇게 세 가지이다.

특별법의 요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여러 논의들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요건이 너무 적거나 느슨하다며 이제 아무나 호적상의 성별 변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와는 달리 지나치게 규제하고 제한하는 것 아니냐며 비판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다분히 후자의 입장에서, 이 법안 내용에 상당히 비판적인데,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특별법이 가지는 자체의 한계 때문이다. 일테면, 요건 2호는 “생식능력이 없을 것”을 요구하는데 그렇다면 호르몬 투여만으로도 생식능력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호르몬을 일정 기간 이상 투여하면 된다는 건지, 그럼에도 성기재구성수술을 해야 한다는 건지, 무정자증이나 “불임”이라면 호르몬 투여 등의 의학적 조치가 없어도 된다는 건지, ftm의 경우 호르몬 투여도 없었지만 완경으로 “생식능력이 없”다면 된다는 건지 모호해서 결국 판사의 재량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법을 구체적으로 혹은 좀 더 엄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하나는 왜 입법운동이어야 하는가이다. 입법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방식은 결국 더 많은 규제조건들을 만들거나 명문화한다는 점, 기존의 법안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다는 점 등의 한계가 있다. 모든 입법운동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호적상의 성별 변경 등과 관련한 특별법은 호적정정은 필요하지만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법적 요건에 부합하도록 요구하거나 원천 배제한다. 그리하여 “진성트랜스젠더”이기 위한 “조건”, “자격심사기준”을 더 많이 그리고 더 까다롭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트랜스젠더의 성별 변경과 관련한 문제는 현재의 특별법이나 입법운동방식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경험들과 겹쳐 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의사는 아이를 1번/3번 아니면 2번/4번으로 구분하고, 그렇게 국가에 등록하고 관리하는 체계-주민등록제도와 호적제도가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들이 호적상의 성별 변경을 요구하는 토대란 점에서, 문제는 법안을 제정해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호적법과 주민등록법 등 관련법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근본’적인/‘효과’적인 “해결”일 수 있다. 입법운동은 사실상 기존의 법을 문제시하지 않으며 기존의 법/담론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법을 만든다는 점에서, 기존의 인식에 문제제기하는 것은 별로 없으며(있다고 해도 결국 기존의 법/담론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고) 호적정정이 쉬워졌다고 해서 다른 불편들까지 해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국사회는 취직 등에 있어 주민등록초본 등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다. 성별변경과 관련한 기록이 주민등록초본엔 남고(최근, 임시방편으로 요청이 있을 경우, 기록을 지울 수 있다고 하지만 원칙적으론 남는다), 그리하여 입사원서를 제출하는 것은 곧 “나는 트랜스젠더이다”라고 커밍아웃/아웃팅하는 격이다. 트랜스젠더임을 말하지 않고 입사했다가, 한참 후에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퇴사 혹은 “권고사직”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이러한 기록은 “나를 뽑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재 계류 중인 특별법이 지금의 내용으로 통과되어도, 이렇듯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오히려 호적상의 성별 변경을 더 어렵게 만들거나, 쉽게 만든다고 해도 그에 맞추어 끊임없이 새로운 입법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입법으로 “해결”할 것이며 무엇까지 법으로 통제할 것인가.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질문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주민등록증을 교환하는 것이 불법인데 그것을 처벌할 것인지 말 것인지와 같은 질문구조, “주민등록증 교환이 당연하다고 여기는지”와 같은 질문구조는 현재의 사회제도의 작동을 은폐한다. 이런 식의 질문구조는 주민등록증을 교환하며 살아가야 하는 구조를 얘기하지 않으며, 불법이지만 처벌을 할 것인지 고민이다는 말은 법 자체를 그대로 둔 체, 법이 가지는 문제점, 주민등록증이나 국가가 공인하는 개인 신분증명서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사회문화제도적인 측면에는 질문 하지 않는다(트랜스젠더들에게 신분증은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배신하는 것이란 점은 별도로 하고). 취직할 때 호적등본을 제출하는 것, 술집에서 나이를 검사 한다며 주민등록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문화적인(그리하여 제도적인) 맥락부터 얘기하지 않는 건, 국가에서 인지한 합법적인 존재들을 (은유로서 그리고 문자 그대로) 불법체류자로 확정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들의 주민등록증 교환 행위는, 한국 사회에서 주민등록증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징후하는 현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법안폐지운동이 더 괜찮냐면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법안폐지운동은 사실상 입법운동과 별 차이가 없다. 둘 다 법이라는 담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법(만)을 최종심급으로 여긴다. 입법운동이 법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략이라면, 법안폐지운동은 법이 있어서 문제라고 얘기하기에 법에 도전하는 것 같지만, 결국 법의 권위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방식이며 이런 방식 자체가 법/담론의 효과이다. 현재의 삶은 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입법운동과 법안폐지운동은 별로 다르지 않다.

이 말이 입법운동도 법안폐지운동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입법운동이 필요한 지점들이 있고 법안폐지운동이 필요한 지점들이 있다. 하지만 특별법의 경우, 의사의 소견서를 요구하는 요건 1호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의 성별을 둘 중 하나로 결정하고 그렇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의료체계를 통한 국민국가의 기획을 다시 한 번 반복한다. 더구나 이런 요건은 성별과 성별에 따른 규범을 의사가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 만약 어떤 트랜스여성이 자신은 여성이라고 얘기하는데, 의사는 여성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비록 미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실제 한 트랜스여성은 정신과상담이 끝날 즈음 바지를 입고 갔다가,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정신과상담을 연장해야 했다. 자신이 주장하는 여성성(혹은 남성성)과 의사가 요구하는 여성성(혹은 남성성)이 일치하지 않을 때, “진성” 트랜스젠더임을 결정하는 건 결국 의사(를 매개하는 어떤 담론)가 요구하는 규범성이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한국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젠더규범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도 이런 규범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언제나 상당한 긴장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유일한 법을 기준으로 하지 않기 위해, 현행 법/담론을 유일한 조건이 아닌 여러 법/담론들 중 하나로 상대화하는 방식의 운동은 어떻게 진행할 수 있을까? 법의 효용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법을 상대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이런 고민은, 젠더나 섹슈얼리티가 이미 담론의 구성물임을 숨긴다. 법 이전, 담론 이전의 어떤 젠더나 섹슈얼리티가 있다는 걸 전제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 얘기하는 젠더는 “오직 둘 뿐이고 의사의 할당에 따라 불변하는 것”이란 수식어를 숨긴 것이며, 법조문이 없다면 젠더나 섹슈얼리티의 표현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믿음 역시 현행 법/담론의 효과이다.

“남성”으로 통하는 외형의 사람이 치마를 입으면 안 된다는 법제도는 없지만, “남성”으로 더 잘 통하는 사람이 치마를 입고 돌아다닐 때면, 항상 혐오폭력의 위협을 동시에 느낀다. 아니 치마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자체가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이미 규범적인 법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말한다. 법조문(입법운동/법안폐지운동)이 아니라 젠더나 섹슈얼리티 자체도 이미 법/담론을 통한 해석으로 경험하고 있다면, 입법운동은 무엇을 입법하는 것이며, 법안폐지운동은 무엇을 폐지하는 것인가. 법조문에 있건 없건, 혹은 삭제하건 상관없이, 자연적인 것으로 그리하여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그 어떤 젠더/섹슈얼리티를 고민하는 것이, 법을 둘러싼 논의일 지도 모른다._M#]

논문목차짜기

어제부터 조금은 분주했다. 오늘 개별연구수업이 있는 날인데, 그 준비도 준비려니와 그보다 중요한 논문목차를 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논문목차가 아니라 논문의 서론 초고를 써가기로 했지만, 서론 초고를 쓰기 위해선 목차가 우선 나와야 했고, 그래서 목차를 구성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석사논문은 처음 쓰는 거니까. 흐흐. 논문의 목차가 나와야 서론의 초고를 쓰건 어떻게 될 텐데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명확할 듯 하면서도 모호한 상황이었고, 더 큰 고민은 이 주제를 “석사논문” 주제로 해도 괜찮나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왠지 원고지 80~100매 정도의 논문으로 쓰면 될 걸 A4 100매 분량으로 쓰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서론이야 관습적으로 “1.연구배경, 2.문제제기, 3.연구내용, 4.연구방법”이라고 쓰고 본론을 적었는데, 막막. (물론 이것도 개별연구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수정했음.)

고민은 현상학적 분석과 담론적 분석을 연결하고 우울증적 젠더정체성 형성(이렇게 뭔가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사실 잘 모르는 말들이라는 거… 이제 공부해야 한다는 거… ;;;;;;;;;;)을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들 사이의 접점을 명확하게 잡기가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딴짓하기 바빴다(?!?!?!?!?!?!) 오늘이 개별연구수업인데 어제야 목차를 짜겠다고 작정을 한 것도, 이들 사이의 접점을 좀처럼 잡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론 명확한 듯 하면서도 그것을 목차로 구성하기엔 어려웠다고 할까. 그러면서도 요즘 읽고 있는 글들이 있고, 이번 학기 개별연구를 통해 읽고자 하는 글들이 있기에 그 책과 논문들을 중심으로 목차를 짜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떤 골격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고 든 느낌. 본론을 4개의 장으로 구성한다면 1장과 2장은 그런대로 틀을 갖춘 느낌인데 정작 루인의 아이디어와 논의가 가장 많이 들어갈 3장과 4장은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지만, 그런 얘기들을 논문에서 했다간 자칫 붕 뜨는 내용이 되기 쉽고 그래서 전체적인 맥락에서 겉돌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 내용을 뺄 수도 없었는데, 어쨌거나 논의를 위해선 그 내용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선은 조금은 겉도는 내용을 둔 체 개별연구에 들어갔다.

물론, 개별연구에선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도 같이 해야 했지만, 논문 목차를 통해 버틀러 얘기를 상당 부분 할 수 있기 때문에 발제 준비는 상당히 부실하게 했다;;;

아무튼, 이렇게 목차를 짜서 서둘러 수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 목차는 좀더 골격을 갖출 수 있었다. 전체적인 틀은 많이 안 바뀌었고, 다만 각각의 챕터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이냐를 더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자칫 각각의 챕터들이 겉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얘기들도 많았고 곧 정리해야 할 내용들이다.

잘하면 내년 1월 초, 좀 더 걸리면 내년 7월 초 즈음이면 나오겠지. 우선은 내년 1월을 예상하고 있다.

천천히 가는 거야.

[논문] 저항의 맥락화: Lila Abu-Lughod “The Romance Of Resistance”

관련 글: 저항의 낭만화(한나님의 글)

※카테고리는 그다지 신경쓰지 마세요;;;;;

저자: Lila Abu-Lughod
제목: The Romance of Resistance (여기)
출처: American Ethnologist, Vol. 17, No. 1. (Feb., 1990), pp. 41-55

종종,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어디서 들어본 것, 혹은 언젠가 어느 수업 시간에 배운 것만 같은 것일 경우,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서 아는 척 하려는 루인과 만난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무섭다고 느끼는 건 익숙해지는 것이다. 학년 구분 없는 수업시간에 4학년이 1학년 보다 유리한 점은 4학년이 1학년 보다 더 많이 안다거나 책을 더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답안을 작성하는 방법, 공부를 하는 방법 등이 익숙할 가능성 때문이다. 전공수업일 경우엔 그 전공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들에, 1학년 보다는 4학년이 더 익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무서운 건 이 지점이다.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자주 듣다보니 자주 접하다 보니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맥락인지 모른체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 그렇게 익숙하기만 할 뿐인데 마치 안다고 믿게 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

일테면, 젠더라는 단어가 그렇다. 여성학 수업을 몇 번 듣고 나면 혹은 여성학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읽고 나면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익숙해서 그저 일상어처럼 사용하기 쉽다. 루인 역시 너무도 자주 그러하고. 하지만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의 어떤 맥락을 알고 있다는 걸까?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자주 사용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는 언어이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던 이유엔 “젠더”라는 단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가 루인의 전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전히 젠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여성학기초 과목을 들으면 젠더를 아주 간단하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으로서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지만, 당시 기말 답안지엔 이 문장을 A4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적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선 이토록 단순한 설명에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요즘의 고민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위에 링크한 한나님의 글을 읽으며,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행위성을 안다고 착각했지만, 그동안 무얼 안다고 믿었던 걸까.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싶었고, 얼추 일주일 전 즈음에 이 논문을 읽었다. 그러며 남은 화두는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라는 말.

뒤통수를 맞은 것만 같은 느낌은, 이 말에서 비롯한다. 그동안 행위성 혹은 저항을 한 개인이 그 사람의 맥락에서 어떻게 협상하는가를 읽으면서, 그것이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전복”이란 의미가 아님은 분명히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권력의 작동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고민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항 혹은 행위성을 통해 권력의 징후를 읽어 내지 않았다면/않고 있다면, 도대체 무얼 안다고 믿는 걸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한다는 말 혹은 어떤 앎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렇게 작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위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이론적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하는 건 언제든 자신을 투명한 위치로 간주할 위험성이 있고, 자신이 무슨 문제를 범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는 말은 무겁게 다가왔다. 어떤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은 이것에서 비롯한다.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밖으로 나갔을 때, 들었던 그 복잡한 감정-혹시나 공포범죄를 경험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이런 불안이 싫음과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은 정확하게 이런 감정이 발생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옷이라는 것, 옷을 입는다는 것의 의미와

저자의 또 다른 지적은 저항이란 언제나 맥락적이라는 지점이다. 즉, 모든 저항의 행위가 모든 문화적인 가치를 전복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선 저항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다른 지점에선 권력을 지지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트랜스젠더는 성별이분법을 강화한다는 말과 성별이분법을 초월한다는 말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 하리수를 향한 비난 중 하나는 하리수는 이성애 성별이분법을 더욱더 강화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식의 비난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민등록번호 1번/3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1번/3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주민등록번호 2번/4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2번/4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이런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식에서 하리수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했다. 성별 혹은 젠더가 (어떤 의미에서) 임의적이라는 말은 기존의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것으로 느껴졌지만, 방송을 통해 하리수는 이른바 “여성”이라는 그 어떤 이미지를 “여성보다 더 여성답게” 재현했고 그래서 기존의 성별이분법을 더 강화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하리수의 행동은 동시에 이른바 “여성성”(혹은 “남성성”)이라는 젠더가 몸에 부착해 있는 본질적인 속성이 아님을 얘기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처럼 저항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Abu-Lughod는 이걸 훨씬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 ㅠ_ㅠ)

그러니 저항 혹은 행위성은 맥락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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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Butler가 현상학을 비판하는 지점 역시 이 지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버틀러의 글 혹은 이론은 현상학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버틀러는 종종 현상학을 비판하는데, 현상학은 담론이 작동하는 측면을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 말이 현상학으론 담론의 작동을 얘기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버틀러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은 Abu-Lughod가 저항을 낭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말고 권력을 징후하는 것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제안과 상당히 일치한다.